단편

판도라의 상자

<span class="sv_member">에메트</span>
에메트 @acidcatsle
2026-02-21 01:35

비일상에 발을 걸치지 않았더라면 에르위니아와는 신문에서 보는 인연으로 끝났을 동료, 엘피스가 운영하는 회사에서 오픈하는 미술관의 첫 손님은 이번에도 은율이었다. 자연과 예술의 아름다운 결합. 별조차 제대로 볼 수 없는 도시 한 복판에 인위적으로 만든 정원 딸린 미술관에 붙이기엔 꽤나 거창한 수식어였다. 엘피스도 부정하지 않았고.

 

각양각색의 꽃과 식물이 누군가의 시간과 노력으로 만들어진 조각과 적절한 위치를 찾은 조명과 어우러진 정원을 느긋하게 걷던 은율이 걸음을 멈췄다. 휴가라는 달콤한 보상-비상 상황이 벌어지면 날아가지만-을 걸고 심부름 정도야 시키긴 하지만 은율을 포함한 작은 새의 아이들은 제 맹약자를 동행시키는 일이 드물었다.―연애 중인 조정하는 자, 디 클루체바야와 조정의 맹약자, 유세진이라는 예외가 있기는 했다.― 그런 은율이 에르위니아를 동행으로 선택했다면 이유는 뻔했다.

할 이야기가 있다는 소리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둘만이 있는 장소를 선택할 정도로 다른 사람에게 들려주고 싶지 않은 비밀스러운 것이겠지.

 

“어디든 둘 뿐인데 편히 말해.”

“보채지마. 엘피스한테 피드백 하는 대가로 얻는 첫 손님이니까 꼼꼼하게 봐야 하거든.”

“그럼 오늘의 동행으로 나보다는…”

“레티랑 로뎃찌가 나았을 지도 모르지.”

 

살아있는 재해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는 파괴하는 자, 네피스 L. 아스트라페와 아름답게 웃는 얼굴로 흘려 들었다가는 후회하게 되는 예언을 입에 올리는 로비사 드 발라이트에게 붙여진 독특한 애칭이 은율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 독특한 애칭을 지은 사람이자 부를 수 있는 유일무이한 사람이기도 한 은율은 색이 다른 눈으로 에르위니아를 담으며 웃었다.

 

“그렇지만 내가 선택한 사람은 레티랑 로뎃찌가 아니라 너야. 그래서 네가 여기 있잖아, 에이린.”

 

삐진 상태에 가까웠던 제 마음을 돌린 직속상관을 보며 마주 웃은 직속부하는 직속상관의 관람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서 일부러 벌렸던 거리를 좁혔다. 그리고 자신을 올려다보는 직속상관―은율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알았어. 얌전한 키링남의 역할을 수행하죠. 손을 주세요, 상관님.”

“얌전? 키링남? 얌전? 키링남?”

“반복하지 마. 상처야. 차라리 안 어울린다고 말하는 게 낫겠어.”

 

응. 그럴 테니까 에이린도 그만 숨겨.

은율의 입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말에 에르위니아의 표정이 굳었다. 꼼꼼하게 봐야한다는 은율의 말은 분명 진심이었겠지만 그녀는 할 이야기가 무엇인지 어렴풋이 감지하고 벽을 세웠던 자신의 벽이 낮아지길 기다렸던 모양이다. 덫에 걸린 꼴이 우스워서 웃지도 못 하는 에르위니아의 뺨에 은율의 손이 닿았다.

 

“길잡이별은 화내지 않겠지. 기만을 당했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을 우리의 별은 자신의 동료인 배반자를 위로하고 언제나의 자신으로 돌아갈 거야.”

“계속 숨기는 것이 좋은 진실도 있어, 창조하는 자.”

 

진실의 무게를 혼자 끌어안고 싶은 에르위니아의 고집을 안타까운 표정으로 지켜보던 은율이 입술을 열었다. 엘. 이제 누구도 부르지 않는 애칭이 자신의 고막을 두드린 순간, 에르위니아는 아직 자신의 뺨에서 떨어지지 않은 은율의 손을 두 손으로 잡고 고개를 숙였다. 은율. 에르위니아가 모든 힘을 쥐어짜서 겨우 부른 이름을 가만히 듣고 있던 은율이 입을 열었다.

 

“진실을 아는 무덤의 왕이 계속 흔들겠지. 그도 오랜 시간 맹약자로 일했으니까 방어할 수 있을 거야. 하지만 미래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고, 지구라는 이름의 전장은 맹약자라 불리는 자들을 죽이기 위해 선택됐어.”

-기억도 못 하는구나, 어리석은 남자.

 

찾아온 기회를 절대로 놓치지 않을 무덤의 왕이 진실을 간파하고 웃으며 했던 말이 에르위니아의 머릿속을 스쳤다. 그리고 그 말을 들었던 라세인이 보였던 동요도.

자신의 손으로 태어난 세계를 멸망시킨 용사이기에 배반자라 불리는 청년은, 더 이상 도피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자신의 고집과 소중한 동료의 생명. 답을 알고 있는 그가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고개를 든 에르위니아는 덤덤하게 말했으나 여전히 안타까운 표정을 지은 채, 자신을 바라보는 은율의 손에 감사의 마음을 담아 입을 맞췄다. 입술이 떨어짐과 동시에 그녀의 손을 놓아준 에르위니아는, 평소의 표정으로 돌아와 이제 안심하라는 것처럼 은율의 뺨을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

 

“알았어. 대신 이 곳을 한 번 더 빌려줘.”

“허락은 내가 아니라 엘피스에게 맡아야지.”

“같이 말해달라는 소리야. 엘피스가 절대로 거절하지 못 하게. 그리고 부탁이 있는데…”

 

에르위니아가 자신만이 들을 수 있는 작은 목소리로 속삭인 말을 들은 은율은 잠깐 생각에 잠겼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긍정의 뜻이었다.

 

자연과 예술의 아름다운 결합. 두 번째로 이곳에 온 오늘도 그 수식어는 거창하다고 생각하며 에르위니아는 미술관에 걸리게 된 그림을 보았다. 능력을 사용한 대가로 소멸한 순간부터 모두의 기억에서 사라진 존재이자 에르위니아의 운명을 세계에 묶은 연인, 티니아의 초상화였다. 진실을 숨기지 않고 말해줄 것을 전제로 만들어진 초상화를 보며 에르위니아는 쓰게 웃다가, 이제 아무도 부르지 않게 된 그녀의 애칭을 불렀다.

 

“티나.”

 

내 고집은 여기까지인 모양이야. 미안해. 이제는, 내려놓을게.

결심을 마친 에르위니아의 귀를 낯익은 발소리가 두드렸다. 부디 제 표정이 마지막까지 태연하길 원하며 에르위니아는 오랫동안 숨겼던 진실을 듣게 될 동료를 맞았다.

 

“어서와, 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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