倀鬼
“지나가는 나그네님. 이 목소리가 들리오?”
평범한 인간이었다면 홀려버리고 말았을 서러운 목소리가 가혜의 귀를 두드렸다. 오랜 시간을 들여 단단히 쌓아올린 본능이 목소리의 주인을 그냥 두어서는 안 된다고 경고했다. 자신의 세계가 아닌 다른 세계의 일이었으나 무시하지 못한 가혜는 결국,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의 주인을 만나기 위해 골목길로 들어갔다.
목소리의 주인은 골목에 주저앉은 남자였다. 어떤 동물을 닮은 기괴한 가면으로 얼굴을 가린 그의 고개는 어떠한 무게에 눌리기라도 한 것처럼 기울어져있었다. 저 가면이 어떤 동물을 닮았는지 안다면 일이 쉽게 풀릴 거라고 생각하며 가면을 주시하던 가혜에게 남자가 말을 걸었다.
“어서 오시오, 나그네님. 혹시 바쁘지 않다면 그 걸음을 멈추고 내 이야기 좀 들어주시오.”
이야기를 들어달라고 청하는 남자는 인간처럼 보이지만 인간이 아니었다. 가혜는 남자의 정체를 확실하게 파악한 뒤, 남자를 성불시키고 싶었지만 성불에는 몇 가지 조건이 필요했다. 그 조건들을 머릿속으로 떠올리던 가혜는 낯익은 기척에 생각을 멈췄다.
“못 보던 사이에 새로운 친구를 사귀었군, 아가씨.”
오늘 따라 더 얄밉게 들리는 목소리의 주인은 서쪽을 수호하는 사방신, 백호-비천이었다. 어떤 어둠도 두려워하지 않는 금색 눈이 가혜를 담았다. 우선 비천의 오해를 정정해주기로 한 가혜가 입을 열었다.
“오늘 처음 만난 이름도 모르는 자와의 어색한 모습이 그대 눈에는 친구와 대화하는 모습으로 보이는 모양이군.”
“이름 모르는 자에게 귀한 시간을 내어주고 있으니까. 반려님이 생기시더니 굉장히 친절해지셨어, 아가씨.”
“이유가 있다면 그럴 때도 있는 법이지.”
언제나처럼 뼈가 있는 대화를 마친 가혜와 비천은 동시에 남자를 보았다. 갑작스러운 비천의 등장에 혼란에 빠졌던 남자는 혼란을 진정시키고 입을 열었다.
“나그네님들, 들어보시오. 나는 사냥꾼들 밑에서 자란…”
“사냥꾼들 밑에서 자랐다네. 근데 여긴 지구잖아. 사냥꾼 따위는 없을 텐데.”
“헛소리군.”
가혜의 은색 눈동자가 싸늘해졌다. 주변의 온도가 내려가는 것을 느꼈음에도 입을 움직여 말하는 남자를 보며 가혜는 연극을 보는 관람객이 된 것 같다고 생각했다. 비천이 남자의 말도 안 되는 이야기에 태클을 걸었다. 직업을 사방신에서 공격수로 바꾼 모양이군. 공이라도 가져다줄까? 가혜의 뾰족한 한 마디에 비천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이런 상황에서는 공격이 최선의 방법이라는 것을 잘 아는 사람의 연륜이지.”
“사람이 아니라 호랑이 대장이겠지.”
나는 호랑이 대장이 아니야, 아가씨.
호랑이 대장이라는 말에 바로 반박하는 비천의 말을 한 귀로 흘린 가혜의 눈이 남자의 가면으로 향했다. 기괴한 가면은 비천과 대화하면서 이성을 붙잡고 자세히 보니 호랑이의 형상이었다. 나그네님들이라 부르며 자신들에게 어떤 호소를 하는 저 남자의 정체를 파악한 가혜가 손을 쥐었다, 폈다. 남자의 정체가 ‘창귀’라면 평온하게 성불시켜줄 수는 없었다. 무령이 이야기한 사람을 홀리는 악귀를 성불시키는 좋은 방법을 떠올린 가혜가 얼른 더 말해보게. 하고 남자에게 가까이 다가간 비천을 보았다. 호랑이는 겁이 없다. 사냥감의 파악이 끝났다면 더더욱.
“이렇게까지 나그네님들을 간절히 홀리려는 자네를 움직이는 분이 궁금해졌어. 어떤 분이지?”
여상스러운 어조인데도 위압감이 느껴지는 비천의 말이 끝나자 가혜는 낙화를 들었다. 사람을 홀리는 악귀를 성불시킬 좋은 방법을 실행할 시간이었다. 자신이 홀리려는 나그네님들의 의도를 짐작한 남자가 도망가려고 했으나 비천은 그렇게 두지 않았다.
바람이 남자를 구속하는 모습을 보며 가혜가 물었다.
“빨리 끝냈으면 좋겠군.”
“그 분이 빨리 나오신다면 빨리 끝나겠지.”
“그 분이 안 나오면?”
“안 나오면 만나러 가야지.”
“쉽게도 말하는군.”
“아가씨는 이 일이 어려운가?”
가혜는 고개를 저으며 비천과 남자의 곁으로 다가갔다. 이제야 보였다. 목에 있는 선명한 이빨 자국이. 성불하지 못 하고 오랜 시간 저 이빨 자국의 주인 밑에서 일한 영혼이 서럽게 울며 나그네님을 외쳤다. 이 가엾은 영혼은 여전히 이것이 옳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한숨을 삼킨 가혜는 입술을 열었다.
“어렵지는 않지. 그러니까 그대의 계획에 협조할 거야.”
자신이 어떤 방법으로 성불할지 모르는 남자를, 은빛의 바람과 붉은 불꽃이 덮쳤다.
*
아켐언니 리퀘. 언니가 원했던 내용이랑 조금 다를 수도 있음.
아켐언니가 리퀘하면서 풀어준 썰 + 안예은님 창귀 듣고 생각난 것들을 제 식으로 좀 버무렸습니다. 멋진 노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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