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예감

<span class="sv_member">에메트</span>
에메트 @acidcatsle
2026-02-21 01:21

누군가는 레오의 붉은 머리카락을 피에 비유했지만 세젠디프는 그의 붉은 머리카락을 항상 태양에 비유했다. 라위야. 아버지와 똑같은 이름으로 자신을 부르는 그의 머리카락을 세젠디프는 말없이 빗었다. 수없이 여행을 다니는데도 엉키는 일이 없는 덕분에 머리카락을 빗는 일은 금방 끝났다. 레오는 환하게 웃었다. 자유라는 칭호를 가진 현자의 웃음은 태양보다 눈부시게 반짝였다. 고마워. 감사의 인사를 한 레오의 입술에서 이어진 말이 별 일이 아니라고 대답하려는 세젠디프를 붙들었다.


“라위야라는 이름보다 세즈란 이름이 좋아?”

“어떤 이름으로 부르든 상관없습니다.”

“얼굴도, 행동도 말이랑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어, 세즈.”


머리를 언제나처럼 높이 묶은 레오는 대답하지 않는 세젠디프에게 책을 한 권 떠넘겼다. 에인즈에게 줘. 에인즈라는 이름을 들은 세젠디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달갑지 않은 일을 받았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눈썹을 보던 레오가 몸을 돌리며 덧붙였다.


“친해진다면 너랑 걔는 굉장히 좋은 친구가 될 거야.”


경쾌한 발소리가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사라지자 세젠디프는 손에 든 책으로 시선을 내렸다. 이 책을 에인즈에게 주라는 심부름을 수행하기 위해 세젠디프는 레오의 저택을 나왔다.


“제게 용건이 있나요, 황자님?”


들고 온 책을 책상에 내려놓고 끝낼 셈이었던 세젠디프의 손이 멈췄다. 세젠디프는 고개를 돌려 목소리의 주인을 보았다. 얼마 전, 크게 싸웠던 룸메이트의 환히 웃는 얼굴이 세젠디프의 눈을 채웠다.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세젠디프의 룸메이트―에인즈 아시야 히즈키야는 군더더기 없는 동작으로 책을 들었다.


“어떤 책인지 아시나요?”

“제목만 봤지.”

“내용도 괜찮은 책이랍니다. 읽어보세요.”

“한가하게 책을 추천할 정도로 여유가 넘치는군.”

“그분이라면 퇴학이라는 강경한 수단은 쓰지 않을 테니까요.”


황자님처럼 아부를 떨 생각도 없고요.

자신의 행동을 아부로 취급한 룸메이트에게 내지를 뻔한 주먹을 움켜쥔 세젠디프는 방을 나가기 위해 문으로 향하다 황자님. 이란 목소리에 걸음을 멈췄다.


“황자님이란 호칭을 입에서 지울 생각이 없는 모양이군, 히즈키야.”

“지금은 그렇습니다.”

“용건은?”

“이 책, 읽어보실 생각이 있으면 언제든 말해주세요. 빌려드리는 건 어렵지 않으니까.”


세젠디프는 거절하지. 라는 대답을 되돌려주고 문을 열었다. 제 룸메이트, 에인즈와는 영영 친해질 수 없을 거라는 강한 예감을 끌어안은 채로.


*


“세즈.”


세젠디프의 꿈을 끝낸 목소리는 그때와 다르게 들리는 친우의 목소리였다. 잤나요? 세젠디프는 두 손을 뻗어 얄밉게 웃는 에인즈의 얼굴을 눌렀다. 꾸욱. 황자의 행동을 당해주던 에인즈는 세젠디프의 두 손을 떼어낸 뒤, 세젠디프의 눈을 제 손으로 가렸다. 세젠디프는 에인즈가 선물한 어둠에서 도망치지 않았다.


“어둠을 선물하다니. 네가 현자가 되면 내릴 칭호는 어둠과 관련된 단어가 좋을까.”

“미래의 일이군요.”

“멀지 않은 미래니까 대비해. 주연은?”

“잠든 상태에요.”

“고단한 하루였을 거야. 꿈을 꾸지 않고 푹 자둬야 할 텐데. 그런 약은 없나?”

“꽤 신경을 쓰는군요. 세즈, 당신은 그녀에게…”


호감을 품고 있나요?

자신의 눈을 가린 손을 치우고 일어난 세젠디프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노랫소리가 굉장히 아름다운 소녀에게 어떤 감정을 품고 있는지에 대해 묻는 친구를 보았다. 이름을 말해줬는데도 단 한 번도 이름을 부르지 않는 에인즈야말로 이상했다. 자신의 이름도, 다른 사람의 이름도 다 불러줬던 그 부분을 지적하려던 세젠디프는 지적을 포기하고 에인즈의 질문에 솔직하게 대답했다.


“맞아, 에인즈. 내가 품은 감정은 호감이야. 시간이 흐르면 그 이상이 될 수도 있겠지.”

“당신이 앉게 될 자리의 무게를 당신의 옆에 있는 사람 역시 져야할 텐데요?”

“내가 아니라 주연을 걱정하는군.”


주연을 좋아해?

언제나처럼 웃은 에인즈가 대답을 위해 입술을 움직이려는 그 순간, 발소리 하나가 두 사람의 곁으로 다가왔다. 미안해요. 발소리의 주인인 긴 흑발이 아름다운 소녀, 주연의 입에서 흘러나온 사과의 말을 들은 세젠디프와 에인즈는 동시에 고개를 저었다. 사과할 일이 아니라는 뜻이 담긴 두 사람의 행동을 본 주연이 안심한 표정으로 웃었다. 세젠디프는 듣지 못한 에인즈의 대답을 듣는 것을 다음으로 미루기로 하고 주연에게 손을 내밀었다.


“에스코트 할 기회를 주겠어?”

“세즈가 하는 에스코트인가요? 황자님이 하는 에스코트인가요?”

“세즈.”

“세즈라면 허락할게요.”


세젠디프가 내민 손에 주연의 따스한 손이 올라갔다. 평소보다 더 기합이 들어간 모습으로 주연을 에스코트 하던 세젠디프는 주연을 먼저 방으로 올라가게 한 뒤, 에인즈를 기다렸다, 평소보다 느린 걸음으로 도착한 친우와 눈을 맞춘 세젠디프가 말했다.


“대답을 못 들었어, 에인즈.”

“내가 대답을 들려줘도 달라지는 건 없어요, 세즈.”

“시도도 해보지 않고 포기하는 건 너답지 않아.”


거리를 좁힌 에인즈가 아까 전처럼 세젠디프의 눈을 가렸다. 상냥한 세즈, 당신의 사랑에 집중하고 지금의 평화를 즐기세요. 세젠디프의 눈을 가린 손은 힘없이 떨어졌다. 세젠디프는 힘없이 떨어진 손에 가려졌던 복잡한 웃음을 지은 에인즈를 보았다. 그는,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 사랑과는 비교가 안 되는 비밀이 자신의 친구에게 있다는 사실을 직감한 세젠디프가 멀어지는 에인즈의 팔을 잡았다.


“뭘 숨기고 있는 거야, 에인즈 아시야 히즈키야. 대답해.”


몇 번을 물었지만 에인즈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대답임을 직감한 세젠디프는 에인즈의 팔을 놓았다.


“들어가죠. 그녀가 기다리겠어요.”


에인즈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세젠디프를 재촉했다. 세젠디프는 대답하지 않았다. 에인즈와 친구가 되기 전에 들었던 레오의 말이 혼란에 잠긴 세젠디프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친해진다면 너랑 걔는 굉장히 좋은 친구가 될 거야.


세젠디프는 입술을 깨물었다. 우리는, 네 비밀이 밝혀진 뒤에도 친구로 있을 수 있을까? 끝내 던질 수 없는 질문이 혼란을 버리지 못한 세젠디프의 마음을 어지럽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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