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내일을 위한 싸움

<span class="sv_member">에메트</span>
에메트 @acidcatsle
2026-02-21 01:17

계단을 오를 때마다 많은 생각이 세이의 동그란 머리 안을 스쳤다. 그만하자고 붙잡는 목소리는 금방 떨쳐버릴 수 있었지만, 자신의 마음을 모르는 친구의 얼굴이 생각난 순간에는 참을 수 없는 고통이 밀려왔다. 주저앉을 뻔한 다리에 힘을 줘서 겨우 버틴 세이는 계단을 걷는 속도를 높였다. 끝이 보이는 계단에서 수억 정도의 시간을 흘려보낸 기분이 들었지만 실제로는 아니었다. 몸이 무거워지기 전까지 반 정도는 날아왔으니 소요한 시간은 더 짧았으리라. 마침내 도착한 목적지에서 조우한 군신이라 불리는 남자는 예상대로라는 듯이 웃으며 세이를 옥좌에 앉아서 내려다보았고, 세이는 산호색 눈으로 옥좌에 앉은 남자와 그의 옆에 그림자처럼 붙어있는 은발의 여성을 올려다보았다. 먼저 말을 꺼낸 사람은 남자―루아그였다.


“분노한 그 발라우르를 기대하고 있었습니다만 결국 당신이 왔군요. 몇 번이나 만난 당신이지만 환영합니다, 종막의 대행자.”

“세계의 적인 당신의 상대는 제거자인 내가 해야죠. 환영 인사는 됐어요, 세계의 적이 된 군신. 종막에서 벗어나고 싶다면 순순히 포기하세요.”

“망가진 몸으로 신전을 가진 신이자 당신이 태어나기 전부터 신이었던 나를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몇 번을 싸워도 결과는 같습니다.”


루아그의 날카로운 지적은 옳았다. 레오의 조치로 겨우 버티고 있는 세이의 힘으로는 루아그를 막을 수 없었다. 이 일을 해결할 수 있는 더 강한 사람이 올 때까지 발을 잡아두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약한 제거자인 세이는 자신의 약함을 순순히 긍정했다. 당신의 말이 맞아요, 군신. 하지만― 지금까지 벌어진 싸움에서 가라앉거나 흔들렸던 산호색 눈은 가라앉지도 않았고, 흔들리지도 않았다. 곧게 루아그를 보고 있었다.


약하다는 이유로 자신이 여기서 물러나면 사라지는 사람과 상처를 받는 사람이 있다. 적이라는 이유로 누군가의 미래를 멈추고, 눈도 뜨지 못한 어린 아이를 죽이고, 살려달라고 외치는 소리를 무시하고, 검을 휘두르는 자신을 긍정하며, 고백의 말 한번 건네지 못한 친구를 위해서라고 변명하는데 바빴던 이기적인 제거자의 상처로 가득한 손에 아름다운 순백의 검이 들렸다. 라키엔(Lakien). 자신과 이곳까지 달려온 순백의 에고 웨폰을 손에 든 소녀는 입술을 열어 어느 때보다 선명한 목소리로 자신이 이 자리에 있는 이유를 남자에게 고했다.


“내가 죽더라도 당신은 막아요. 당신의 아픔은 이해하지만 그 아픔을 이유로 사람들을 희생시키지 마세요.”

“성공하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갈 곳도 없는 발라우르 하나가 사라지고 내 연인이 돌아올 뿐이에요.”

“당신에게는 그녀를 희생시킬 권리도 없어요. 그녀의 희생으로는 당신도, 당신의 연인도 행복해지지 않는다고요!”


누군가의 희생으로 행복할 수 없다는 세이의 말을 들은 루아그는 앉아있던 옥좌에서 내려왔다. 지금까지의 싸움에서 한 번도 같은 땅에 서서 서로를 마주본 적이 없었던 세계의 적과 제거자는 처음으로 같은 땅에 서서 서로를 마주 보았다. 아직까지도 현실을 인정하지 않고 자신을 부정하는 천족을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던 군신은 같은 세계에서 태어났으나 자신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 하는 천족의 말에 반박했다.


“행복해집니다. 당신도 자신을 희생하는 사랑을 하고 있으니 이해할 텐데요. 애타게 사랑하는데도 자신의 마음은 조금도 알아주지 않는 천제를 위해서.”

“난 진유가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해 여기에 왔어요. 모두를 지키기 위해. 내가 없는 세상이라도 내가 좋아하고 사랑하는 모두가 살아가길 원해요.”


군신이 반박의 근거로 든 예시가 자신이었음에도 세이는 무너지지 않았다. 사랑하는 모두가 살아가는 세상이라니. 세이가 말하는 모두가 살아가는 세상은 지금까지와 같은 세상이었다. 그 세상에는 세이도 없었지만 군신, 루아그 카이스티아를 여기까지 달려오게 한 그의 연인 역시 없었다.

연인이 돌아오지 않는다면 존재할 가치도 없는 이 세상을 계속 유지시키겠다는 목적으로 순백의 에고 웨폰을 들고 자신을 막아선 제거자와의 대화에 더 이상의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세계의 적은, 그늘이 진 얼굴로 자신의 명령을 얌전히 기다리던 자신의 에고 웨폰, 에세리아(Esseria)를 보았다. 마스터인 자신의 시선을 이해한 에세리아의 얼굴에 더욱 어두운 그늘이 드리워지는 모습을 무시하며 루아그가 말했다.


“모두를 지키기 위해 왔다니. 더 이상의 대화는 의미가 없겠군요, 제거자.”

“오늘이 마지막 싸움이에요, 군신. 세계를 위해 결말을 내죠.”

“좋습니다, 에세리아.”


그늘을 얼굴에서 없애지 못한 은발의 미녀가 사라지고 군신의 손에 라키엔과 비슷한 생김새의 정교한 무늬가 새겨진 은색의 검이 들렸다. 몇 번이나 부딪혔고 세계를 멸망시키는 쪽에 섰음에도 이길 수가 없었던 군신의 에고 웨폰은 세이의 파트너인 라키엔보다 먼저 만들어진 라키엔의 형제였다.

싸움이 시작된 날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이겨본 적이 없는 군신이 손에 들린 그의 파트너이자 라키엔의 형제를 세이와 세이의 파트너인 라키엔을 향해 겨눴다. 결코 돌아갈 수 없는 한 걸음을 내딛을 시간이 왔음을 깨닫고 세이는 심호흡을 했다. 사랑하는 여성을 구하기 위해 달려간 골드 드래곤에게는 또 다시 거짓말을 해버린 셈이 되어버렸지만 후회는 없다.

구해서 탈출해요, 캐리. 그때까지는 무슨 일이 있어도 죽지 않을게. 내 긍지에 걸고. 같이 돌아가겠다는 말은 거짓말이었지만 이 말은 거짓말이 아니야. 입 속으로 중얼거린 세이는 자신의 마지막을 함께 할 파트너를 고쳐 쥐었다.


“라키엔, 나의 영원한 파트너. 마지막 싸움이에요. 나와 함께 버텨줘요.”


진천의 색도, 반천의 색도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버린 순간부터 자신을 희생한 소녀의 날개가 펼쳐진 것을 신호로, 제거자와 세계의 적의 마지막 싸움이 시작되었다.

내일을 위한 싸움이었다.


*
발라우르=드래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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