節分
01.
무투대회의 우승자에게 낙화를 준다는 소식을 들은 수란이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올린 사람은 가혜였다. 가혜의 아버지이자 거해궁의 현 수장인 가환이 낙화의 관리자이긴 했지만 가천의 피가 섞인 반천을 숨기고 키운 그 사건은 여전히 가환의 목을 졸랐다. 누구에게도 반응하지 않던 낙화가 반응했더라도 가혜의 손에 낙화를 들려주고 싶지 않은 장로 측의 속셈을 읽은 명석한 소녀는 수련에 매진하고 있는 가혜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발소리를 들었을 텐데도 가혜의 은색 눈은 수란을 보지 않았다. 얌전히 기다리는 것을 선택한 수란의 귀를 목검을 손에 든 채로 호흡을 고르는 가혜의 목소리가 두드렸다.
“바로 인사하지 못 했군. 미안해, 수란.”
“괜찮아요. 무투대회에 나갈 거예요, 가혜?”
“응. 나가야 해.”
무투대회에 관심도 없던 가혜는 무투대회의 참가를 긍정했다. 수란은 누구도 가혜의 고집을 꺾지 못 하리란 사실을 가혜의 불처럼 타오르는 눈을 통해 알았다. 가족들조차 꺾지 못 하는 저 고집의 소유자가 어디까지 올라갈지를 기대하기로 한 수란의 손이 가혜의 손을 잡았다.
“승리를 가져와요.”
최고의 응원을 받은 가혜가 수란을 보며 웃었다. 나는 낙화만 필요하니까 승리는 네게 줄게, 수란. 승리의 영광에는 관심이 아예 없다는 것을 드러내는 가혜의 말에 수란은 웃음을 터뜨렸다. 승리의 욕심이 없으면서도 우승하기 위해 참가하는 자신의 친구가 귀여운 탓이었다.
02.
“아가씨도 이 무투대회의 참여자인가?”
가혜가 은색 눈을 한번 깜박이며 자신에게 말을 걸어온 남자를 보았다. 새하얀 머리카락과 금색 눈을 가진 남자는 가혜의 오빠인 이경과 비슷한 나이로 보였다. 그래요. 모르는 사람에게 반말을 할 수 없었던 가혜가 존댓말로 대답하자 남자는 정령과의 계약으로 붉은빛이 도는 금색 머리카락을 쓰다듬고 싶다는 것처럼 바라보며 입술을 움직였다.
“비천.”
“당신의 이름은 무령 어머님께 들은 적이 있어요. 나는 거해궁의 수장인 가환과 그의 첫 번째 부인인 예영의 딸인 가혜. 천족이에요.”
“아가씨에게는 우승의 욕심이 보이지 않는군.”
“우승하기 위해 참여하지 않았으니까요.”
“그 말은 나를 웃기려고 하는 농담인가?”
“그것까지 말해줄 이유가 없네요. 당신이 원하는 대로 생각하세요.”
하지만 나를 상대하려면 진심을 다 하셔야 할 거에요.
우물 안 개구리처럼 살아온 소녀의 오만으로 보이는 가혜의 말과 태도에 가혜보다 오래 살아온 신수는 웃음을 터뜨렸다. 가혜는 얼굴을 찡그리긴 했으나 그 이상의 반응을 하지 않고 진행자의 호명을 기다렸다. 무투대회의 진행자가 전장으로 올라올 사람의 이름을 호명했다. 자신의 이름이 호명된 순간, 가혜는 머리카락을 모아 쥐었다. 늘 풀려있던 머리카락이 높이 묶였다.
비천과의 재회는 결승에서 이뤄졌다.
“안녕하세요.”
“아가씨가 여기까지 올라오다니 놀랐어. 우승에 대한 마음은 달라졌나?”
“아뇨. 당신과 대화했을 때와 똑같아요.”
서로만이 이해할 수 있는 대화를 나눈 가혜의 손과 비천의 손에 진행자는 목검을 건넸다. 무투대회만을 위해 만들어진 특별한 목검을 쥔 가혜는 시작하자마자 자신을 향해 휘둘러지는 공격을 피했다. 가혜가 바라는 건 한 번의 틈이었고 그것을 위해 일부러 만든 틈을 호랑이는 놓치지 않았다. 날카로운 발톱을 춤을 추듯이 우아하게 피한 가혜는 자신을 공격한 비천의 힘을 그대로 이용해 비천을 땅으로 추락시켰다. 콰앙! 엄청난 소리와 함께 승리가 확정된 순간, 전장이라는 무대에 혼자 남은 새는 은색 눈으로 바닥에 추락한 호랑이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확인하고 고개를 돌렸다.
03.
“오니는 밖으로.”
누가 오니라는 거냐고 반박해주고 싶은 마음을 누르며 가혜는 초등학생 정도로 보이는 비천을 바라보았다. 평소처럼 올려다보지 않고 내려다보아야 하는 사방수호신 백호의 손에는 콩이 들려있었다. 콩을 본 가혜는 오늘이 일본의 명절이라는 세츠분이라는 사실을 기억했다. 자신과는 관계가 없는 명절이었으나 비천과는 관련이 있었다. 그의 반려인 윤영의 몸에 흐르는 피의 절반은 세츠분이라는 명절을 보내는 나라의 피였으니까. 오니라고 불렀지만 그 이상의 도발로 일을 크게 만들기는 싫었는지 손에 든 콩을 뿌리지는 않는 비천에게 가혜는 봉투를 내밀었다.
“그대가 선물을? 무식하게 사람을 밖으로 던지던 천족이 이렇게 변하는군. 사랑은 놀라워.”
“타인이 들으면 오해를 불러올 말은 적당히 해줬으면 좋겠군, 백호.”
“오, 나는 진실을 말했을 뿐이야. 그리고 밖으로 던져진 건 사실이잖아.”
오래 전의 일이라고 잊었냐는 말과 함께 봉투를 받아든 비천이 내민 것은 콩이었다. 세츠분과 콩이 관계가 있다는 것은 알지만 콩을 어떻게 사용하는지 모르는 가혜가 은색 눈을 깜박이며 비천을 보았다. 사방수호신 백호는 세츠분이 있다는 것은 알지만, 세츠분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 하는 가혜를 보며 짓궂게 웃었다. 백호는 입술과 마찬가지로 짓궂게 웃는 금색 눈으로 가혜를 보며 말했다.
“이제부터 집 안에 콩을 뿌릴 생각인데 그 콩을 당신의 나이만큼 주워 먹으면 내가 그대에게 언제 던져졌는지도 기억나겠지.”
“사양하지. 선물은 제대로 전달했으니 이만 돌아가겠어.”
“그래, 잘 가.”
아가씨.
가혜는 아가씨라고 부르는 비천을 보다 몸을 돌렸다. 이 호랑이는 기억하고 있는 이름으로 자신을 불러줄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비천에게 자신의 이름을 불러달라고 강요할 생각이 없는 가혜의 걸음은 꽃을 피울 준비를 하는 벚나무 앞에서 멈췄다. 곧 꽃이 핀다. 지는 모습이 아름다운 분홍의 꽃.
모든 생명이 추운 겨울을 견디며 기다리던 따스한 봄이 오고 있었다.
*
아켐언니 리퀘. 살짝 수정해서 다시 올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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