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성

가장 어두운 밤에도 별은 빛난다

<span class="sv_member">에메트</span>
에메트 @acidcatsle
2026-02-07 19:10
작은 서점에서 일하는 카멜리아 테슬라의 꿈은 자신이 쓴 각본으로 만들어진 연극을 관람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가족들과 함께 본 연극을 보면서 품은 꿈을 이루기 위해 매일매일 각본을 썼다. 완성된 각본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들은 전부 카멜리아의 하나뿐인 가족인 길버트에 의해 갈기갈기 찢겨나갔다. 새벽까지 머문 도박장에서 돈을 전부 잃어버리고 돌아온 한심한 남자의 분풀이였다.

술 냄새와 담배 냄새를 향수처럼 두른 길버트의 손에 찢어져서 완성한 각본이 처음으로 사라졌던 날에는 카멜리아도 버틸 수 없었다. 마음이 꺾여버린 그녀를 일으킨 것은 길버트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아서 집에서 뛰어나왔다가 본 인형극이었다. 처음 본 연극에 대한 흥분으로 심장이 빠르게 뛰었던 그 날의 설렘이 다시 떠올랐다. 포기가 빠른 자신에게도 포기할 수 없는 게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카멜리아는 집으로 돌아가 작은 노트를 만들었다.
품에 숨길 수 있어서 길버트가 발견하기 힘들어진 노트를 그녀는 늘 몸에 지니고 다녔다. 오늘도 노트를 가지고 서점으로 출근하던 카멜리아의 걸음을 멈추게 만든 사람은 갑자기 다가와서 그녀를 부른 신사였다. 카멜리아가 일하는 서점은 작긴 했지만 다양한 손님이 방문했다. 방문하는 손님의 다양한 옷차림을 통해 그들의 신분을 파악하는 그녀의 호박색 눈에 눈앞에 있는 신사의 옷이 담겼다.

이 근방에서 보기 힘든 고급스러운 천으로 만들어진 옷이었다. 사용인을 시키지 않고 서점에 직접 방문해서 책을 구매하는 레녹스 백작이 아니었다면 그녀는 스트로베리 블론드의 머리카락을 가진 눈앞의 신사가 귀족임을 몰랐으리라. 귀족이 대체 자신에게 왜. 긴장한 카멜리아의 마음에 피어난 의문은 새하얀 장갑을 낀 손이 내민 물건으로 해결되었다. 그냥 지나칠 수도 있는 물건을 주워준 신사, 다니엘이 내민 노트를 받은 카멜리아는 자신의 소중한 물건을 찾아준 은인에게 감사의 인사를 건네며 고개를 숙였다.

“제 물건이 맞아요.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신사님.”
“잃어버린 물건이 종이가 아니라 유리구두 같군.”
“신데렐라의 유리구두만큼 소중하긴 해요. 저는 카멜리아 테슬라랍니다. 괜찮으시다면 신사님의 이름을 알려주시겠어요?”
“다니엘 로렌 윈체스터. 그럴 생각으로 주운 게 아니니 답례는 됐어.”

친절하다고 생각했던 다니엘은 답례를 받을 생각이 없다는 말로 선을 긋고 몸을 돌렸다. 카멜리아가 사는 작은 동네와는 어울리지 않는 귀족이 거리를 걸었다. 목적지를 정하지 않고 걷는 것처럼 보이는 다니엘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카멜리아는 자신이 출근 중이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녀는 다니엘 덕분에 되찾은 노트를 떨어뜨리지 않을 주머니에 넣은 뒤, 아까보다 빠른 걸음으로 자신이 일하는 서점으로 향했다.

손님이 드문드문 오는 서점을 닫기 직전에 방문한 손님은 아침에 본 낯익은 신사였다. 사람의 방문을 알리는 맑은 종소리와 함께 서점 안으로 들어온 다니엘은 어서 오세요. 라고 인사하는 카멜리아를 차가운 회색 눈으로 바라보았다. 카멜리아를 보던 다니엘의 회색 눈이 아래로 내려갔다. 그의 눈이 보는 것이 자신이 각본을 쓰다가 손님이 들어오는 바람에 여전히 펼쳐둔 노트라는 사실을 깨달은 카멜리아가 황급히 노트를 덮었다.

“클라이드는 유리구두를 숨기는 사람이었군.”
“클라이드요?”

서점에는 다니엘과 카멜리아뿐이었다. 결국, 그가 부른 ‘클라이드’라는 사람은 자신이라는 게 된다. 정말 여러 얼굴을 가진 사람이다. 한 가지 얼굴만을 가진 자신과는 정반대의 사람인 듯한 다니엘의 호칭을 일단 받아들이기로 한 카멜리아는 여전히 자신의 노트를 보는 다니엘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궁금하세요, 윈체스터 씨?”
“궁금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쓰는 각본에서도 이렇게 종잡을 수 없는 등장인물은 만들지 못하는 각본가는 조금 고민하다가 누구에게도 보여준 적이 없는 노트를 내밀었다. 그는 답례가 필요하지 않다고 말했지만, 그녀에게는 지금 하는 이 행동이 답례였다. 누구에게도 보여준 적이 없는 각본이었니 더더욱.
다니엘은 카멜리아가 건네준 노트를 받고도 펼치지 않았다. 주인인 제 허락을 기다리는 그의 모습은 완벽한 신사였다. 종잡을 수 없긴 해도 신사로서 지킬 것은 확실히 지키고 있는 사람이라 생각하며 카멜리아가 입술을 움직였다.

“주워주셨으니 봐도 괜찮아요.”
“레이디 테슬라가 허락하신다면.”

대답하면서 웃는 다니엘의 근사한 신사 같은 얼굴이 카멜리아의 시선을 붙들었다. 다니엘의 하얀 장갑을 낀 손이 노트를 펼쳤다. 황급히 시선을 돌렸던 카멜리아의 호박색 눈이 펼쳤던 노트를 덮는 소리가 들린 후에야 다니엘을 보았다. 싱긋 웃은 다니엘은 어땠나요? 라고 물어보지 못하고 망설이는 중임에도 얼굴에서 기대를 지우지 못하는 카멜리아를 보다 말했다.

“나쁘지 않아. 좋다고 말하기에는 한참 부족하지만.”
“그건 나쁘다인거 같은데요.”
“내 좋다의 기준은 꽤 높아서. 누구도 충족하기 힘들겠지.”

말을 마친 다니엘은 노트를 카멜리아에게 내밀었다. 그의 모습은 노트를 처음 주워준 순간과 같은데 이상하게 심장이 빠르게 움직였다. 길버트가 폭력을 사용할 때와 비슷할 정도로 빨랐으나 그 순간과 다르게 그녀는 두려움을 느끼지 않았다. 처음으로 완성한 각본을 어느 극단에 보여줄지 고민하던 날처럼 기대와 설렘만을 느끼는 카멜리아가 서점을 나가려는 다니엘을 불렀다.

“완성하면 다시 보여드려도 될까요?”
“만난다면.”

재회를 기약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다니엘은 재회가 있다는 것처럼 말하며 서점을 떠났다. 카멜리아는 혼자만의 공간이 된 서점에서 다니엘이 남긴 말을 곱씹었다. 만난다면. 그와 정말로 만나고 싶었던 그녀는 두 손을 모아 기도를 하려다가 모으려던 두 손을 계산대에 내려놓았다. 다니엘은 기도와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고민 끝에 틈날 때마다 런던 여기저기를 돌아다니자는 괜찮은 방법을 떠올린 카멜리아는 뿌듯한 얼굴로 정리를 시작했다.

*

틈날 때마다 런던 여기저기를 돌아다니자는 좋게 보면 도전적이고 나쁘게 보면 무모한 방법은 성공해서 카멜리아는 다니엘을 만날 수 있었다. 각본이 완성되기 전이라는 큰 문제가 있었기에 아쉬움을 드러내는 카멜리아를 보며 다니엘은 웃었다. 이름 모를 들꽃이 핀 공원에서 재회한 두 사람이 다음으로 만나게 된 장소는 서점이었다. 카멜리아는 둘밖에 없는 서점에서 다니엘과 대화를 나누다가 아직 완성하지 못한 각본을 떠올렸다. 길버트에게 노트를 찢겼던 때를 제외하면 한 번도 멈춘 적이 없었던 각본은 다음이 생각나지 않아서 멈춘 상태였다. 처음 겪는 슬럼프를 해결하기 위해 수면 시간까지 줄어버린 카멜리아가 조심스럽게 다니엘을 불렀다.

“윈체스터 씨, 만약에 제가 윈체스터 씨에게 완성된 각본을 보여주지 못하면… 실망하실 건가요?”
“기다리겠지.”
“기다림은 언젠가 끝나요.”
“끝나지 않는 기다림도 있어. 내게 어울리지 않는 희망적인 말인가.”
“아뇨. 오히려 그 말을 한 사람이 윈체스터 씨라서 좋아요.”

끝나지 않는 기다림이 현실이라고 생각하게 되거든요.
웃으면서 말한 카멜리아의 머릿속에 뒤엉킨 실타래처럼 풀리지 않았던 각본의 다음 장면이 떠올랐다. 지인이지만 그 전에 손님인 다니엘 앞에서 잠시만요. 를 외치고 노트를 펼칠 수 없었던 카멜리아는 머릿속으로 떠오른 장면을 정리한 후, 서점을 나가는 다니엘을 배웅했다. 다음에는 보여줄 수 있을 거라고 말하며 웃는 카멜리아를 향해 마주 웃어준 다니엘의 뒷모습이 태양으로 녹아가듯 사라졌다. 서점으로 돌아온 카멜리아는 녹아가듯 사라진 다니엘의 뒷모습을 떠올리다가 붉어진 뺨을 매만졌다. 언제부턴가 자라나기 시작한 사랑이라는 이름의 감정이 그가 뒤돌아보았다면 숨어버리고 싶을 정도로 커졌다. 복잡한 표정을 지은 카멜리아가 중얼거렸다.

“이 감정에는 행복한 결말이 없을 것 같은데.”

*

감정만이 아니라 자신의 꿈에도 행복한 결말이 없다는 사실을 알리려는 듯 길버트가 또다시 노트를 빼앗으려고 들었다. 카멜리아는 이제 가족이라고 부르고 싶지 않은 짐승에게서 겨우 지킨 노트를 들고 집을 뛰어나왔다. 노트 한 권만이 전부인 맨몸으로 비가 내리는 런던 시내로 뛰어나온 여자는 아무도 없는 광장의 분수대에 도착했다. 분수대의 물을 두드리는 빗방울들을 물에 빠진 생쥐처럼 엉망이 되어서 지켜보던 카멜리아는 어느 순간부터 비가 자신의 몸으로 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가 천천히 자신을 비로부터 보호해주고 있는 사람을 보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검은 우산을 씌워준 그는 다니엘이었다. 비가 와서 더욱 흐린 런던의 하늘을 가린 검은 우산 속에서 카멜리아는 다니엘을 올려다보았다. 많은 말들이 맴돌았으나 그녀가 가장 먼저 한 말은 각본의 현재 상황이었다. 그는 약속이라고 생각하지 않을지 몰라도 그것은 그녀에게 있어서 꿈만큼이나 소중한 약속이었으니까.

“각본을 완성했어요. 젖어서 다시 쓰게 됐지만. 나는 또 당신을 기다리게 만들었네요. 미안해요.”
“사과할 일인가.”
“두 번이나 기다리게 했으니까요. 기다리는 거… 높은 사람들은 싫어하잖아요.”
“즐거운 기다림도 있지.”

우산을 들지 않은 다니엘의 손이 뻗어져서 카멜리아의 차가운 뺨에 닿았다. 새하얀 장갑이 젖어가는데도 자신의 뺨에서 손을 떼어내지 않는 다니엘의 모습에 카멜리아는 그가 각본을 단순한 이유로 기다리는 게 아님을 깨달았다. 이 엉뚱한 신사님은 각본만이 아니라 자신에게도 흥미가 있는 것이다. 뒤늦게야 알아챈 진실을 부정하고 싶은 카멜리아가 고개를 저었다.

“이게 즐거운 기다림이라고요? 그건 너무….”
“믿기 힘들다면 믿지 않아도 좋아. 그건 네 마음이니까, 클라이드.”

많은 시간을 알고 지내지는 못했어도 카멜리아가 아는 사람 중에서 제일 멋지고 근사한 신사는 우산을 카멜리아의 손에 건네준 뒤, 자신의 겉옷을 벗어서 젖은 그녀의 어깨에 올렸다. 태양이 녹아들 듯 사라지던 날처럼 몸을 돌려서 걸어가는 그의 옷자락을 카멜리아는 우산까지 놓으며 붙잡았다. 손만큼 강한 힘이 담긴 그녀의 호박색 눈이 그를 보았다.

“믿어요. 그런데 지금의 나한테는 아무것도 없어요.”
“네가 있고 각본이 있지. 내용은 다 기억한다고 말했었잖아.”
“아.”
“이제 눈앞의 상인에게 네가 가진 걸 팔아봐, 클라이드.”

너라면 할 수 있다는 응원의 말은 없었으나 다니엘은 웃고 있었다. 그 웃음이 최고의 응원이 되어 카멜리아에게 용기를 주었다. 비가 그치고 무지개가 뜬 그 순간, 카멜리아 테슬라의 입술이 움직였다. 자신의 말이 실패라는 결과를 낳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녀는 멈추지 않았다. 그래야 눈앞의 사람과 새로운 미래를 향해 걸어갈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니까.

*

각본의 마지막 페이지에 뭐라고 적을지 고민하는 카멜리아의 머리 위로 입맞춤이 떨어졌다. 카멜리아는 고개를 들었다. 입맞춤을 떨어뜨린 주인공인 다니엘이 웃고 있었다. 카멜리아는 일어나서 웃는 그의 목으로 팔을 뻗었다. 두 팔로 다니엘의 목을 끌어안은 카멜리아가 시간이 흐른 지금도 좋다는 말을 해주지 않는 자신의 연인이자 후원자를 향해 말했다.

“이번 각본도 제일 먼저 봐줘요.”
“그건 늘 내 몫이지.”
“좋다는 말은요?”
“내 기준은 높아, 카멜리아.”
“이름으로 안 불렀다면 기준이 높다는 말에 바로 반박했을 거예요.”

투덜거리는 카멜리아의 입술 바로 앞에서 다니엘이 얼굴을 멈췄다. 숨소리가 들릴 정도로 가까워진 그의 얼굴을 보며 카멜리아는 눈을 감았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 좋다는 말을 듣기 위해 노력하는 각본가와 자신의 기준을 위해 언제나 노력하는 그녀의 각본을 처음으로 보는 백작의 입술이 맞닿았다.
부드럽고 깊은 입맞춤이 마무리를 앞둔 각본 옆에서 시작되었다.


*
다니카멜 10주년 감사합니다~!!
AU로 간만에 써봤는데 너무 오랜만에 썼지만 다니카멜 연성이라 행복하게 썼어.
티아랑 다니 내가 많이 좋아해. 사랑해.
긴 시간 함께해줘서 고맙고 앞으로도 잘 부탁해!
오늘도 좋은 하루 보내고 오늘만이 아니라 항상 좋은 일 가득하길 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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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어두운 밤에도 별은 빛난다 : 토마스 풀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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