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날
물과 기름처럼 뒤섞이지 않고 나눠진 하늘과 바다가 나란히 놓여서 만든 파랗고 청량한 세계를 호박색 눈에 담으며 아쉐리카는 직사각형 모양의 아이스크림을 입에 물었다. 멜론맛의 초록색 아이스크림―이름도 멜론과 비슷했던―이 가진 달콤함과 시원함이 이 새파란 세계를 지배한 여름이라는 계절의 더위를 식혔다. 가벼운 마음으로 공략하러 온 던전의 핵이 만든 환영치고는 수준이 높았다. 길드에서 건네준 정보와는 전혀 다르다. 길드가 일부러 잘못된 정보를 흘렸거나 알아낸 정보는 사실이지만 모종의 이유로 핵에 ‘작은 변화’가 생겼거나. 후자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또 다시 아이스크림을 베어서 먹는 아쉐리카의 곁으로 한 명의 소년이 다가왔다.
검은 머리카락과 검은 눈을 가진 체릿빛 입술의 소년은 아쉐리카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본래 모습보다 한참이나 어려 보였다. 아쉐리카의 모습 역시 소년의 기억에 남아있는 본래 모습보다는 어린 모습이겠지만. 소년은 비일상을 접하고 헌터라는 직업을 가지게 된 아쉐리카가 같이 일하자는 제안을 건넨 처음이자 마지막 파트너로 이름은 여운하였다. 가족조차 이름으로 부르는 일이 드문 아쉐리카가 이름으로 부르는 일이 많은 비일상의 유일한 공유자이자 자칫 잘못하면 돌아올 수 없는 위험에 여러 번 뛰어들면서 관계를 쌓아올린 소중한 존재가 아쉐리카의 옆에 앉았다.
“오늘도 여기에 있네요, 쉐리 씨.”
여름보다는 봄에 어울릴 부드러운 목소리가 아쉐리카의 귀를 두드렸다. 아쉐리카는 남은 아이스크림을 빠르게 해치운 뒤, 손에 들린 나무막대를 이리저리 돌려보다가 뒤로 던졌다. 휙하는 소리를 내며 날아간 나무막대가 어디로 떨어졌는지 아쉐리카는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이 모든 것은 던전이 만든 환영이었으니까.
이 환영에 자신이나 운하가 가진 기억과 지식이 쓰이고 있다는 것도 알았다. 문제는 핵이 만든 세계에서 탈출하는 방법을 모른다는데 있었다. 이능력과 착용한 장비가 방어해준다고 해도 핵이 만든 세계에 들어갔다가 살아온 헌터는 소수에 불과했다. 살아온 소수의 헌터가 되기 위해서 눈부신 태양 아래에서도 열심히 움직인 아쉐리카였으나 그녀는 오늘도 허탕을 치고 말았다. 답답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편의점에서 산 아이스크림을 들고 바다가 보이는 잔교까지 온 아쉐리카가 검은 털의 강아지를 연상시키는 파트너, 운하를 보았다. 소년으로 보이는 운하가 여름이 만든 청량한 풍경 안에서 반짝였다. 부모님이 선물로 주었던 보석보다 아름다운 그의 모습을 아쉐리카는 느긋하게 감상했다.
“학교에 가도 의미가 없잖아. 탈출에 도움이 되는 지식을 하나라도 알려줬다면 갔어.”
“그 말이 맞아요. 탈출에 도움이 되는 지식은 없죠.”
“내 기억과 당신 기억을 멋대로 쓰는지 수업이 이상하기도 해.”
고등학생들이 듣기에는 어려운 지식을 가르치는데도 모든 학생들이 순순히 그 수업을 듣는 학교의 이상함을 참을 수 없었던 아쉐리카는 이 이상한 세계에서의 등교를 그만두었다. 핵은 부모님과 가족들의 모습을 빌린 가짜들로 아쉐리카를 설득하려고 다양한 방법을 썼지만 어떤 방법도 통하지 않음을 깨닫자 아쉐리카를 방치했다. 하지만 세계를 부수기 위한 정보를 얻기 위한 조사는 방치하지 않았다.
이 이상한 세계에 아쉐리카와 운하를 계속 붙들어두려는 것처럼.
“꿈에 들어가는 영화, 본 적 있어?”
“끝없이 회전하는 팽이가 나오는 그 영화를 말하는 거라면 본 적 있어요.”
“그 영화처럼 꿈에 들어온 기분이야. 이건 꿈이 아니라 던전의 핵이 만든 환영이라서 조건만 맞추면 나갈 수 있겠지.”
“영원히 이 세계에 갇힌다는 결말은 쉐리 씨의 머릿속에 없나 봐요.”
“파트너 덕분에 등록한 헌터라는 안전장치를 만든 덕분이지.”
안전장치를 거부하고 미등록 헌터로 살아가려던 아쉐리카를 운하는 몇 번이고 설득했다. 설득당한 쪽은 다양한 거절의 이유를 대던 아쉐리카였다. 전화와 대화로 열심히 자신을 설득하던 그 날의 운하가 떠올라서 웃었던 아쉐리카가 잔교의 바닥에 누웠다. 운하는 그런 아쉐리카를 가만히 내려다보다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그늘이 있는 곳으로 이동하는 게 어때요, 쉐리 씨?”
“난 여기가 좋아, 운하. 세상의 끝처럼 보이잖아.”
“이제는 내 말보다 쉐리 씨가 하는 말이 더 시처럼 들리네요.”
“누구를 닮아버린 모양이지.”
파트너인 누구를.
비일상이 아니라 일상에서 살아가는 것이 더욱 어울리는 운하가 웃었다. 호박색 눈으로 봄을 닮은 그의 아름다운 웃음을 바라보던 아쉐리카는 길드에서 건넸던 던전에 관한 정보 중 하나를 떠올렸다.
사람이 가진 깊은 감정에 반응하는 핵일 가능성이 있으니 주의해서 핵을 부술 것. 그 정보가 정말이라면 핵은 자신이나 운하가 가진 어떠한 감정에 반응해서 이 환영의 세계를 만들었을 지도 모른다.
자신이 태어난 계절인 여름만이 가득한 세계. 어려운 지식을 가르치는 수업. 끈질기게 이어지던 설득. 그동안 본 모습들을 통해 핵이 반응한 감정의 주인공을 찾아내기 위해 기억을 더듬던 아쉐리카가 운하의 검은 눈을 보았다.
-어렸을 때의 당신은 어떤 사람이었어?
던전에 들어가기 전, 운하에게 던졌던 질문이 아쉐리카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끝나면 대답해주겠다는 운하의 대답에 의뢰가 얼른 끝나기를 바라고 조금 성급하게 핵으로 다가갔다. 그 직후에 핵이 빛났고 이 세계가 만들어졌다. 드디어 진실을 깨달은 아쉐리카가 몸을 일으켰다.
“미안해. 이 핵, 나한테 반응한 모양이야.”
“쉐리 씨가 사과할 일은 아니에요. 우리가 하는 일은 이런 위험을 언제나 겪을 수 있는 일이잖아요.”
“그래도 사과는 해야지. 운하도 똑같은 일이 벌어지면 나한테 사과할 거잖아.”
“파트너라서요?”
운하의 질문을 들은 아쉐리카는 파트너라서가 아니야. 라고 말하며 고개를 저었다. 핵이 자신이 가진 깊은 감정에 반응해서가 아니었다. 비일상을 통해 만나긴 했지만 자신을 조금씩 변화시키고 있는 이 사람 앞에서는 솔직해지고 싶었다. 제 마음에 꽃을 피운 감정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된 아쉐리카는 운하의 앞으로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운하는 아쉐리카가 내민 손을 잡았다. 그녀가 내민 손을 잡는 것이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라는 것처럼.
던전의 핵은 아쉐리카가 드러내지 않은 욕심에 반응한 모양이다. 레벨이 높은 던전의 핵이 구현한 환영이었다면 이렇게 어색한 세계가 아니라 제대로 된 세계를 만들었을 테지. 자신의 감정에 영향을 받은 탓인지 기억까지는 건드리지 않은 핵의 어설픔에 감사하며 아쉐리카가 입을 움직였다.
“여운하를 좋아해. 그래서 가끔은 당신을 독점하고 싶다는 내 감정에 핵이 반응했어. 이 감정을 이렇게 드러내고 싶지는 않았는데.”
실망했어? 라고 묻는 아쉐리카를 보며 다정하게 웃은 운하의 검은 눈이 아쉐리카의 호박색 눈을 담았다. 운하의 입술이 움직이려던 그 순간, 핵이 만든 환영의 세계가 눈부신 빛을 발하며 두 사람을 감쌌다. 빛이 사라진 직후, 환영의 세계에서 현실로 돌아와서 눈을 뜬 아쉐리카와 운하는 서로를 바라보다 이제 빛을 잃어버리고 새까만 곡옥으로 변한 핵을 가져온 통에 넣었다.
“일은 끝났네. 하지만 아직 끝나지 않은 일이 있어.”
본래의 모습으로 자신의 옆에 선 운하의 손을 잡은 아쉐리카는 자신의 손을 마주 잡아주는 운하를 향해 여름의 태양처럼 눈부시게 웃으며 말했다.
“그 세계에서 운하가 하려던 대답 못 들었거든. 들려줄 시간이야.”
“말보다 빠른 대답이 있어요.”
“말보다 빠르다니 기대되네.”
“눈을 감아줄래요?”
아쉐리카는 운하가 말하는 대로 눈을 감았다. 세상이 아까 전과 다르게 새까맣게 변한 순간, 부드러운 입술의 온기와 체온이 그녀의 입술에 닿았다. 말보다 빠르고 정확한 키스라는 대답에 화답하듯 입술을 연 아쉐리카의 두 팔이 운하를 끌어안았다.
마음이 통하고 관계가 바뀌었다. 인생에서 가장 멋진 일이 벌어진 행복하고 아름다운 여름날이었다.
*
운하쉐리 12주년 축하합니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운하쉐리가 12주년! 시간이 정말 빠르게 지나간다는 사실을 다시금 실감했지 뭐야.ㅠㅅㅠ
이번 12주년 연성은 여름날의 운하쉐리. 제목도 여름날인데 교복 입고(!) 만난 운하쉐리가 보고 싶어서 어려지게 해봤어. 다시 커졌지만.^~^!
12년이란 긴 시간을 나랑 쉐리랑 함께 해줘서 고맙고 앞으로도 잘 부탁해. 세하랑 운하오빠 내가 많이 좋아해. 사랑해. 건강 잘 챙기고 더위 조심해야해. 꼬오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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