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가 가져온 운명에 대하여
혼자 쓰기에는 넓은 서재의 의자에 앉으려던 리카르도 스칼리에티의 눈이 책상 위에 놓인 하나의 대본을 보았다. 대본의 표지에는 ‘사랑’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제목이 적혀있었다. 어울리지 않아. 취향도 아니지만. 이라고 중얼거리며 대본을 손으로 집은 리카르도는, 의자에 앉아 자신이 처음으로 찍게 될 로맨스 영화의 대본을 매만졌다.
취향이 아닌 작품은 촬영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한 배우, 리카르도 스칼리에티가 로맨스 영화의 주연이라니. 그를 아는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을 일은 지금 현실이 되었다. 원인은 반년 전에 개봉한 작품의 실패였다. ‘매번 취향 작품만 선택하는데도 한 번도 안 망하는 행운의 배우’라는 타이틀은 작품의 실패와 함께 멋지게 날아갔고, 간판 배우인 리카르도의 갑작스러운 추락에 고민하던 소속사는 리카르도를 설득한 끝에 그를 로맨스 영화의 주연을 뽑는 비공개 오디션에 참가시켰다. 취향이라고 말하기는 힘든 작품이었지만 리카르도는 최선을 다했고 그 결과는 합격이었다. 소속사가 이 결과를 멋지게 포장해서 추락한 간판 배우의 이미지를 회복할 준비를 하는 사이, 리카르도는 본업을 준비하기 위해 합격과 함께 자신의 손에 들어온 영화의 대본을 읽기로 했다. 아까부터 대본을 매만지기만 하고 펼쳐지는 못 하고 있었지만 촬영은 내일이었다.
“이것도 운명일 테니까.”
받아들여야지. 라고 중얼거리며 리카르도는 거리를 두려는 것처럼 매만지기만 하던 대본을 펼쳤다.
“안녕하세요, 스칼리에티 씨?”
촬영장에서 만난 상대 배우는 파비앙 모로였다. 정리를 하고 온 것인지 배역을 위해 꾸민 것인지 궁금한 부스스하게 뜬 녹색이 도는 밝은 갈색 머리카락을 가진 그는 여름의 숲을 떠올리게 하는 진녹색 눈동자처럼 생기가 가득한 사람이었지만, 어떤 작품이든 가리지 않고 찍는 배우였기에 배역에 따라서는 생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주역이나 조역이 되기도 했다. ‘파비앙 모로의 필모그래피는 모든 사람이 즐거운 종합선물세트’라는 한 평론가―그는 평론으로 수많은 배우를 슬럼프에 빠뜨린 사람으로 유명했다.―의 칭찬을 떠올리며 리카르도는 내밀어진 파비앙의 손을 잡았다.
“잘 부탁합니다, 파비앙 모로 씨.”
“파비앙이라고 불러요. 그리고 동갑인데 말 편하게 해요. 힘들면 나부터 할까?”
만난 지 5분도 안 됐는데 말을 놓자니. 처음 겪는 상황이었지만 이 영화는 로맨스였고 리카르도의 상대역은 파비앙이었다. 자신의 연기와 영화에 가장 도움이 될 행동을 선택한 리카르도가 그러지. 라고 대답하며 간단한 악수를 마친 뒤, 파비앙의 손을 놓았다. 촬영장의 모든 사람들이 준비를 마치자 첫 번째 촬영이 시작되었다. 첫 촬영은 주역인 리카르도와 파비앙의 첫 만남이었다. 그리고 대본을 통해 리카르도가 파악한 파비앙의 배역은 밝게 보였지만 사실은 속에 큰 아픔을 품은 청년이었다. 리카르도의 배역은 그런 파비앙에게 첫 눈에 반해 사랑에 빠지는 청년이었다.
지금까지 맡은 배역과는 거리가 있는 연기를 무난하게 해낸 리카르도는 파비앙의 연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데이트라. 다음에 또 만난다면 생각해볼게.”
리카르도는 제가 맡은 청년, 디에고가 첫 눈에 반해 사랑하게 되는 청년, 에밀이 되어 나타난 파비앙을 보며 생각했다. 그는 지금 에밀을 연기하는 게 아니라 에밀 그 자체가 되었다고.
*
에밀을 연기할 때마다 파비앙 모로는 없었다. 에밀만이 있었다. 디에고를 사랑하는 에밀. 디에고를 밀어내는 에밀. 그럼에도 디에고가 드러내는 욕망을 거부하지 못 하는 에밀. 연기가 끝나면 금방 에밀을 버리고 현실의 배우, 파비앙 모로의 모습으로 돌아오는 파비앙에게 품은 신기하다는 감정은 곧 관심이 되었고, 리카르도는 선을 확실히 긋고 살았던 이전과 다르게 사적으로도 파비앙에게 접근했고 결국 메모지에 적은 번호를 건넸다.
“아날로그한 방법을 쓰네. 이런 옛날 방식이 취향이야, 리카르도?”
오늘 촬영의 소품으로 사용했던 립스틱을 톡톡 건드리며 묻는 파비앙의 옆에 앉은 리카르도가 대답했다.
“옛날 방식은 취향이 아니야.”
“그런데도 옛날 방식을 썼구나. 너랑 굉장히 어울리긴 해.”
하지만 만나는 건 거절할게. 문자만 하자. 문자만. 우리 촬영 중이잖아.
영화에 피해가 가는 일은 만들고 싶지 않아. 라고 덧붙이며 선을 그은 파비앙은 리카르도가 건넨 메모지의 번호를 자신의 휴대폰에 저장했다. 저장을 끝낸 파비앙은 휴대폰을 내려놓고 메모지에 자신의 번호를 써서 리카르도에게 건네고 일어났다. 다음 스케줄에 가는 파비앙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그를 지켜보던 리카르도는 휴대폰을 들어 파비앙의 번호를 저장한 뒤, 메시지 하나를 보냈다.
조심히 들어가라는 내용의 메시지는 최근 촬영하는 영화의 내용처럼 달았다.
*
리카르도가 자신이 디에고가 에밀에게 빠진 것 이상으로 파비앙 모로에게 빠졌음을 깨닫게 된 것은 첫 키스씬 촬영 때였다. 가볍게라는 주문을 무시한 입맞춤 덕분에 NG가 났고 촬영이 중단되었다. 감독은 턱을 매만지며 촬영분을 보고 있었고 리카르도는 자신의 NG을 받아준 파비앙을 보았다. 붉어진 얼굴로 숨을 고르는 얼굴을. 좋아한다는 사과를 닮은 얼굴을 보며 리카르도는 배우 일을 시작한 이후, 처음으로 이런 NG라면 계속 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해서는 안 되는 생각을 털어낸 순간, 잘 나와서 아깝지만 스토리에 안 맞는다는 결론을 내린 감독이 손을 들었다. 멀어졌던 리카르도와 파비앙의 거리가 다시 가까워졌다. 머리를 드는 욕심을 누르고 디에고가 된 리카르도는 에밀이 된 파비앙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너답지 않은데 물어볼게. 일부러 낸 거야?”
촬영이 끝났다. 자판기에서 자신이 마실 음료를 뽑던 리카르도는 자신을 찾아 자판기로 온 파비앙이 던진 뾰족한 질문에 리카르도는 그래. 라고 대답하며 방금 자판기에서 뽑은 주스를 파비앙에게 건넸다. 주스를 받지 않고 가만히 있는 파비앙을 보던 리카르도는 파비앙의 손에 억지로 주스를 쥐어주며 말을 이었다.
“그대를 사랑해.”
“이렇게 갑작스런 고백을 하면 내가…”
“나는 그동안 계속 마음을 드러냈어. 그대도 알아챘을 텐데. 내 말이 틀렸나?”
“그래, 네 말이 맞아. 알아챘지. …알았어. 시간을 줘.”
“길게는 줄 수 없어, 파비앙.”
리카르도의 단호한 말을 듣고 잠시 고민하던 파비앙이 서로를 알아갈 시간을 가지고 싶다는 제안을 꺼냈다. 영화에 피해를 주고 싶지 않다면서 만남을 거절했던 파비앙이 자신과 연애직전의 관계가 되겠다고 마음먹은 것이 얼마나 큰 결심인지를 아는 리카르도가 파비앙을 뺨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이 뒤는 확실하게 연애를 시작한 뒤에 하지.”
키스씬을 촬영했을 때와는 다른 이유로 붉어진 파비앙의 얼굴을 두 눈에 담으며 리카르도는 결심했다. 이 영화의 촬영이 끝나는 날, 파비앙의 손을 잡고 가장 근사한 곳에 가서 로맨스 영화보다 더욱 낭만적인 고백의 말을 해주기로.
영화가 끝나기 전에 파비앙과 연인이 되리란 사실을 알지 못 하는 리카르도의 고백 계획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
“그때부터 네게서 시선을 떼어낼 수 없었던 것 같아.”
맛있게 튀겨진 팝콘을 먹던 손을 멈춘 파비앙이 털어놓은 진심에 리카르도는 영화를 멈췄다. 불을 켜고 싶었지만 켜는 순간, 어둠이 숨겨준다는 이유로 평소보다 솔직한 감정이 투명하게 드러난 파비앙의 표정은 금방 변하겠지. 결국 불을 켜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린 리카르도는 파비앙의 손에 들린 팝콘 그릇을 건네받아서 테이블에 내려놓고 사이에 놔둔 쿠션 하나 정도의 거리를 두고 앉아있던 파비앙과의 거리를 좁혔다. 리카르도와 파비앙의 거리가 더 좁혀지려는 그 때, 파비앙의 손이 리카르도의 가슴에 닿았다. 동거를 시작하고 서로의 생활에 맞춰가면서 만든 ‘여기까지 하자.’라는 둘만의 신호였으나 리카르도는 무시했다. 자신에게도, 파비앙에게도 당분간 스케줄이 없음을 잘 파악하고 있는 사람의 뻔뻔함이었다.
“낭만적인 말을 입에 올려서 나를 자극한 사람은 그대야.”
“방금 전에 한 말의 어디서 낭만을 느낀 거야?”
“지금부터 알게 될 거야.”
리카르도는 여전히 제 가슴에 닿아있는 파비앙의 손에 입술로 가져왔다. 둘만의 신호처럼 강하게 거부하지 않는 파비앙의 손에 몇 번이고 입을 맞추며 소파에 파비앙을 눕힌 리카르도는, 열기에 젖어서 자신을 부르기 시작한 파비앙의 진녹색 눈을 전부 삼켜버릴 것처럼 바라보며 나직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러니까 기억하도록 해, 리카르도 스칼리에티에게 사랑이라는 운명을 선물한 파비앙 모로.”
*
리칼파뱡 10주년 감사합니다~ 축하합니다~ 사랑합니다!
시간이 빠르게 흘러흘러 리칼파뱡 10주년이라니! 전부 랑이하고 파뱡이 함께 해준 덕분이야. 정말 고마워.
이번 연성은 에유입니다. 배우인 리칼파뱡이 너무 보고 싶길래. 이 연성을 10주년에. 그것도 비 오는 10주년에 올려서 그런가. 정말 리칼파뱡 느낌이 나는 하루라는 생각이 들었어.
언제나처럼 랑이가 즐겁게 읽어주면 좋겠다.
앞으로도 잘 부탁하고 10년이란 긴 시간을 나랑 리카르도랑 함께 해줘서 고마워. 오늘도 랑이사랑파뱡사랑~!
- 이전글Melting Candy 26.02.07
- 다음글흑백세계의 보석 26.02.07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