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성

녹색 거미줄

<span class="sv_member">에메트</span>
에메트 @acidcatsle
2026-02-07 19:04
1.
그린우드(Greenwood). 이곳을 봐도 저곳을 봐도 녹색과 숲을 찾아볼 수 없는 회색의 도시와는 어울리지 않는 이름이라고 생각하며 아카르 르 메르바하는 걸음을 옮겼다.
보스가 준비해준 차에서 내려 걷기 시작한지 30분이 지났다. 그린우드에 오자마자 몸을 담았던 마피아 조직에서 벗어나 자유의 몸이 된 그를 미행하는 기척은 없었다. 보스와 조직이 정말로 자신을 놓아준 것인지 알기 위해서는 조금의 시간이 더 필요했지만 오늘은 괜찮은 모양이었다.
내일도 괜찮은지는 알 수 없다. 아카르의 현재는 오늘이었고 내일의 괜찮음까지 계산하는 것은 사치였다. 이렇게 말하면 아카르가 섬긴 유일무이한 보스, 펠리시티는 혀를 찰 테지. 빠져나갈 구멍을 미리 준비해놓은 주제에. 라고 덧붙이면서.

다양한 구멍을 준비해두었으나 아카르는 어제까지 마피아였다. 죽음의 그림자를 늘 두르고 사는 범죄자. 조직과 관계가 없는 자유의 몸이 되었어도 제가 한 일의 업보가 언젠가 돌아오리란 사실은 알고 있다. 그것을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 아카르는 제 손등에 거미줄 형태의 문신을 새겼다.
운이 따라준 덕분에 자신의 업보에 삼켜지지 않은 거미줄 문신의 남자는 피냄새를 맡고 걸음을 멈췄다. 고개를 돌린 그의 검붉은 눈에 상처와 피로 얼룩진 몸으로 벽에 기댄 어린 남자가 보였다. 이제 막 성인이 된 듯한 어린 남자, 네로의 눈에는 그린우드에서 살면서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던 녹색이 있었다.

선명한 녹색. 아카르 르 메르바하는 그 녹색의 눈에서 꺼지지 않는 생명력을 보았다. 아카르는 이대로 놔두면 골목길의 부랑자나 그린우드의 마피아에게 생을 끝마치게 될 네로의 곁으로 다가갔다. 간단한 시험이었으나 합격을 결정하는 사람이 아카르인 이상, 합격할 확률은 적었다.
5분. 기다림을 끝낸 아카르가 몸을 돌린 순간이었다. 벽에 기대어 숨을 몰아쉬던 네로가 아카르의 곁으로 다가온 뒤, 손으로 아카르의 팔을 붙잡았다. 강하게. 이제부터 일상에 가까운 삶을 살아가겠지만 자신이 쌓은 업보를 따라 찾아오는 불청객을 항상 맞이할 은퇴한 마피아는 자신을 강하게 붙잡은 거리의 청년에게 부드럽게 웃으며 물었다.

“이름이 뭐죠, 그대?”


2.
이름을 말하고 의식을 잃은 네로를 새로운 집으로 데려온 아카르는 의식을 회복하자마자 자신을 경계하는 네로를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경계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을 건네는 친절 대신 제대로 움직일 수 없는 몸의 회복을 도와줄 음식을 놓고 아카르는 방을 나갔다. 처음엔 모든 것을 거부하듯 음식에 하나도 입을 대지 않던 네로가 마침내 음식에 입을 댔다.

네로가 처음으로 먹은 음식은 사과였다. 조리도 하지 않은 음식을 가장 먼저 입에 대다니. 완전한 받아들임은 아니라는 증명이었으나 거부하고 죽는 것보다는 나았다. 다른 음식들도 조금씩 먹기 시작하자 아카르는 네로에게 말을 걸었다. 대답을 하지 않는 네로에게 이름을 알려주고 이곳이 어디인지를 알려준 아카르는 이제 제법 먹는 양이 늘어난 네로의 식사가 끝나자 네로에게 휴대폰을 내밀었다.

“선물이에요, 그대.”
“아카르가 나한테 왜 휴대폰을 주는지 모르겠어.”

가지고 도망치거나 팔면 어쩌려고?
주고 싶어서 준 거니까 네로가 원하는 대로 해요. 라고 대답한 아카르는 휴대폰을 가지고 도망치지도 팔지도 않는 네로를 통해서 그가 지금의 생활을 받아들였음을 알았다. 그리고 네로는 그 날부터 아카르에게 먼저 말을 걸어 이것저것을 물어왔다. 아카르는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아보겠다는 속마음이 뻔히 보이는 질문에 친절히 대답하면서 네로에 대해 물었다. 서로에 대해 많이 알게 된 두 사람이었으나 같이 사는 것은 아니었다. 아카르는 제안하지 않았고 네로는 그저 머물고 있을 뿐이었으니까. 가끔 불청객이 찾아오긴 하지만 괜찮으면 이곳에 머물지 않겠냐는 제안은 아카르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새로 사온 차를 마시던 중에 흘러나온 제안에 잠시 생각하던 네로는 자신이 이 집에서 처음으로 먹은 음식인 사과가 듬뿍 들어간 애플파이를 자르며 대답했다.

“알았어.”

거절의 대답이 아니라는 사실에 기분이 좋아진 아카르가 네로의 애플파이 위에 준비한 아이스크림을 올렸다. 네로는 오븐에서 꺼냈을 때보다는 식었지만 여전히 뜨거운 애플파이와 만나 녹아가는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웃었다.
봄을 품은 햇살을 닮은 포근한 티타임이었다.


3.
오늘도 아카르와 네로가 사는 집에는 불청객이 찾아왔다. 불청객들이 방문하는 빈도는 이전보다 줄었지만 그들이 아예 찾아오지 않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린우드의 마피아로 살면서 만든 업보 때문에 항상 찾아오는 불청객을 바라보던 아카르는 네로의 수면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서 입을 꽁꽁 싸맨 불청객의 가슴에 칼이 꽂혔다. 단말마도 없이 즉사한 불청객의 시신에서 칼을 뽑으려던 순간이었다. 사박사박. 뒷마당의 풀을 밟는 소리와 함께 등장한 잠옷을 입은 흑발의 마른 청년이 녹색 눈으로 아카르를 바라보았다. 처리하는 모습을 보이고 싶진 않았으나 그것은 역시 무리였던 모양이다. 아카르는 여전히 자신을 바라보는 네로에게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무섭나요, 그대?”

고개를 휘저은 네로는 가까이 다가와 아카르의 손을 두 손으로 잡은 뒤, 거미줄 문신이 새겨진 손등 위에 입을 맞췄다. 다른 사람들도 몇 번이나 손등에 입을 맞추긴 했지만 네로의 입맞춤은 조금 달랐다.

“나, 아카르의 곁에 있고 싶어.”

심장의 고동처럼 뜨겁고 강렬한 입맞춤이었다. 아카르는 강해지지 않으면 아카르의 곁에 있을 수 없잖아. 그러니까… 라고 말하며 자신을 올려다보는 네로를 바라보다 네로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이 도시에서는 볼 수 없는 녹색을 품은 눈과 처음 만난 그 날처럼 자신을 강하게 붙잡은 손이 네로와 처음으로 만난 그 날을 아카르의 머릿속에 떠오르게 했다. 이마에 키스했던 입술을 떼어낸 아카르는 웃으면서 네로에게 물었다.

“정말로 내 옆에 있고 싶나요, 네로?”

대답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네로의 입으로 듣고 싶었다. 그런 아카르의 마음을 어렴풋이 알아챘을 네로의 입술이 움직였다. 아카르는 제 예상보다 더욱 만족스러운 대답을 한 사랑스러운 입술에 입을 맞춘 뒤, 이제부터 네로에게 가르칠 것들을 생각했다. 멀지 않은 미래, 이 집은 은퇴한 마피아와 그 마피아가 키우는 녹색 눈의 맹수가 사는 집으로 유명해지겠지.
그 미래를 만들어가며 자신이 쌓은 업보를 함께 짊어지려고 하는 사랑하는 사람을 품에 안고 아카르는 생각했다. 제 거미줄은 눈앞에 있는 이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녹색. 이 도시에서는 한 번도 보지 못한 색을 한 거미줄을 사랑을 가득 담아서 부르며 아카르는 생각했다.

이런 거미줄이라면 영원히 묶여있어도 좋다고.


*
아카네로 5주년 축하합니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아카네로 5주년이 와서 뭘 쓸까 고민하다가 아직 손의 거미줄 문신을 안 썼다는게 생각나서 짜란! 하고 가져옴.
에유지만 랑이가 즐겁게 읽어주면 좋겠다.
5년이란 시간을 나랑 아카르랑 함께해줘서 고마워. 앞으로도 잘 부탁해~ 내가 랑이랑 네로 많이 좋아해. 사랑해!
늘 건강하기! 꼬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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