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성

Moment of Love

<span class="sv_member">에메트</span>
에메트 @acidcatsle
2026-02-07 19:02
‘불운한 사고’. 까마득한 높이가 된 천장을 올려다보며 사리엘은 자신에게 걸린 저주를 덮기 위해서 가문이 생각한 핑계를 떠올렸다. 불운하긴 불운했다. 한 달에 한 번이라고는 해도 15cm 정도로 작아진 순간부터 사리엘은 혼자의 힘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몸이 되었으니까.
저주는 후계자로 정해지고 몇 달이 흐른 어느 날에 찾아왔다. 흠을 만들어서 사리엘을 후계자에서 끌어내릴 생각으로 저주를 건 범인은 자신의 계획을 실행하기도 전에 죽었고, 사리엘은 풀 방법도 없는 저주를 끌어안은 채로 살아가게 되었다. 불운한 사고를 당해 한 달에 한 번씩 후유증을 앓는다는 거짓으로 몸이 작아진다는 저주를 숨긴 채로.

저주를 풀 방법이 없다는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 하고 저주를 풀 방법을 찾는 것에 집착했던 첫 해가 끝나고 사리엘은 자신의 현실을 받아들였다. 집착하면서 정말 온갖 방법을 다 사용한 덕분인지 현실을 받아들이고 포기하는 일은 식어버린 스프를 마시는 것보다 쉬웠다. 하지만―

“불편한 건 없어요?”

태어나기 전부터 평생의 짝으로 정해진 여성, 리즈벳이 걱정이 담긴 아름다운 목소리로 물었다. 직접 만나보지는 못 했지만 초상화로 보았던 플래티나 블론드의 머리카락과 하늘색 눈동자에는 화가의 붓이 담아내지 못한 현실이 있었다. 당황스러운 상황에서도 순간적으로 기지를 발휘한 현명함과 두려움과도 맞서는 강인함. 만나지 않고 결혼했다면 몰랐을 부분들이 저주가 발동될 시기가 아닌데도 작아진 사리엘을 구했다.

“없습니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늦은 감사의 인사를 들으며 웃은 리즈벳이 손에 들린 컵을 사리엘에게 건넸다. 사리엘은 두 번째 감사의 인사를 하며 리즈벳의 손에는 작지만 자신의 손에는 딱 맞는 컵을 받았다. 컵 안의 내용물인 홍차는 따뜻했으나, 사리엘은 차가워진 제 손을 데우는 따뜻함에 평온을 느낄 수 없었다. 오늘 처음 본 약혼녀에게 자그마한 컵에 홍차를 담아달라는 기이한 요구를 하게 만들다니. 복잡해지는 사리엘의 속내를 모르는 리즈벳이 내용물은 같지만 사리엘이 손에 든 컵보다 훨씬 커다란 컵을 들며 말했다.

“신경 쓰지 마세요.”
“오늘 처음 봤잖습니까.”
“얼굴은 초상화로 봤고, 대화는 편지로 몇 번 나눴죠.”

그리고 우리는 결혼을 약속한 사이잖아요. 타인이라고 부를 관계는 아니죠, 소공작.
덤덤한 목소리로 일이 순탄하게 흘러갔다면 찾아왔을 미래를 말하는 리즈벳의 목소리에 사리엘은 나오려는 한숨을 삼키며 입술을 움직였다.

“이 비밀을 문제 삼아서 약혼을 취소하셔도 됩니다. 영애께는 그럴 자격이 있습니다.”
“사과는 받을 생각이지만 당신의 비밀을 문제 삼아서 약혼을 취소할 생각은 없어요.”

사리엘은 생각지도 못한 말을 입에 올리는 리즈벳의 모습을 녹색 눈에 담았다. 화가 난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지만 즐거워보이지도 않았다. 사람의 파악에 능하다는 평을 들으며 살아왔던 차기 공작은, 알면 알수록 깊은 바다를 떠올리게 하는 아름다운 약혼녀에게 물었다.

“원하는 게 있으십니까?”
“소공작과 더 만나보고 싶어요.”

차기 공작의 자리를 바꿀 수 있는 커다란 비밀을 숨겨주는 대가치고는 소박하다고 생각하며 긍정의 대답을 입에 올리려는 사리엘에게 리즈벳이 말했다.

“소공작… 아니. 나와 결혼할 사리엘이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무척 궁금했거든요.”

당신은 나와 죽을 때까지 함께 살아갈 사람이잖아요.
사랑. 사람을 미치게 만들고 사람을 어리석게 만들기에 절대로 하지 않을 것이라고 마음먹었던 그 감정이 사리엘의 심장에 찾아와 싹을 틔웠다. 심장이 제멋대로 날뛰는 소리를 들으며 사리엘은 생각했다.
이 사랑은, 자신을 어떤 미래로 이끌게 될까.

*

거리감이 느껴지던 호칭이 애칭으로 바뀔 때까지는 많은 계절이 필요하지 않았다. 사람과 사람의 거리란 계기가 있으면 금방 좁혀지기 마련이었으니까. 앞으로도 숨기고 살 거라고 생각했던 비밀을 아는 리즈벳과의 시간은 즐거웠다. 흘러가는 시간을 붙잡고 싶다는 생각마저 스쳤을 때는 사리엘도 놀랐다. 저도 모르게 사리엘이 멈칫했다는 사실을 놓치지 않은 리즈벳이 사리엘의 손을 잡고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괜찮아, 시엘?”

리즈벳은 사리엘의 몸 상태에 사리엘보다 더 예민했다. 저주가 밝혀지면 사리엘이 곤란한 상황에 처한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일 테지. 은은한 장미향을 두른 약혼녀의 걱정을 덜어주기 위해서 고개를 저은 뒤, 괜찮다고 대답한 사리엘은 자신의 손에 비교하면 너무나도 작은 리즈벳의 손을 잡았다. 하늘색 눈동자를 한 번 깜박인 리즈벳이 웃으며 물었다.

“밖에서는 언제나 허락을 구하고 잡았잖아.”

자신에게 닿고 싶었냐는 속뜻이 녹아있는 리즈벳의 말을 부정할 수 없는 사리엘이 고개를 숙였다. 리즈벳의 이마와 사리엘의 이마가 닿았다. 거리가 가까워지자 리즈벳의 은은한 장미향이 은은하다고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짙게 변해 사리엘을 붙들었다.

“너는 내 많은 것을 변화시켰어.”
“그게 싫어?”
“싫다면 네 옆자리를 원하지 않겠지, 리지.”
“내 옆자리는 오래 전부터 당신의 자리로 정해졌잖아, 시엘.”
“가문과는 상관없이 네가 ‘네 마음’으로 날 옆자리에 두고 싶다고 원하길 바라.”

욕심이 많은 소공작님이네. 라고 속삭인 리즈벳이 사리엘의 뺨에 가볍게 입을 맞춘 뒤, 몸을 떼어냈다. 티룸의 2층 전부를 대여했지만 종업원의 입이나 귀까지 막을 수 없었다. 아마 내일이면 소문이 돌 테지. 소문에 이상한 이야기가 붙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사리엘은 자신을 계속 변화시키는 리즈벳을 사랑했고, 리즈벳을 만나기 전이었다면 생각하지 못 했을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모든 순간이 좋았다.

“너는 내 앞에 나타난 또 하나의 심장이니까. 욕심을 내는 게 당연하지.”

리즈벳이 얼마 전에 했던 나는 당신의 바깥에 존재하는 심장이야. 라는 말을 응용한 달콤한 말을 들은 리즈벳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붉게 물든 리즈벳을 제 품에 가두고 그녀의 머리카락에 입을 맞춘 사리엘이 리즈벳의 귀에 속삭였다.

“돌아갈까?”

이 층을 전부 대여했다고 해도 티룸에서는 입 맞출 수 없으니까.
입 맞추고 싶다는 욕심을 드러낸 저주를 끌어안고 사는 약혼자의 품에서 고개를 끄덕인 약혼녀는 티룸을 나와 마차에 탄 이후에도 자신을 놓아주지 않는 사리엘을 바라보다 입술을 움직였다.

“궁금한 게 있어, 시엘. 아직도 저주를 풀고 싶어?”
“이젠 괜찮아. 이 저주가 아니었다면 너를 만나지 못 했을 테니까.“

저주조차도 사리엘의 삶으로 받아들이게 해준 리즈벳이 환히 웃었다. 사리엘은 그 웃음을 바라보다 고개를 숙였다. 제 바깥에 존재하는 아름다운 심장의 달콤한 숨결을 전부 집어삼키기 위해서.


*
시엘리지 10주년 감사합니다~ 축하합니다~ 사랑합니다~!
어느새 10주년이라니 시간이 정말 빠르게 흘러가네요. 전부 오랜 시간 함께 해주신 크림님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10주년 연성은 에유로 준비해봤어요! 즐겁게 읽어주시면 좋겠습니다.
저랑 시엘이랑 긴 시간 함께 해주셔서 감사해요. 크림님이랑 리지 많이 좋아해요. 사랑해요. 앞으로도 잘 부탁드리고 발렌타인만큼 달콤하고 좋은 일들이 크림님께 가득 일어나길 바라요~!!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