萬年雪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다는 것은 누군가에게는 미움을 받는다는 뜻이기도 했다. 조심해. 불꽃보다는 피를 닮은 붉은 머리카락을 그저 묶기만 한―붉은 머리카락을 묶은 머리 장신구의 가격을 생각하면 이렇게 표현할 수 없겠지만.― 레오의 한 마디가 가진 무게를 라세인은 에르위니아가 종적을 감춰버린 후에야 알았다.
세계를 구한 용사라는 지위에 어울리지 않는 결말이었으나 그 결말을 씁쓸하게 생각할 여유는 없었다. 다음 화살이 노리는 상대는 라세인이었으니까.
수도에 더 머물러달라는 황제의 제안을 거절한 라세인은 제국 여기저기를 떠돌아다녔다. 세상이 더 이상 세상을 구한 용사와 그 일행들을 원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는 멸망의 위기를 겪은 적이 없었다는 듯이 평화를 만끽하는 사람들을 통해 깨달았다. 이게 자신의 동료들이 구한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원하는 바라면 받아들여야 했다.
제 마음에 약간의 씁쓸함이 남아있다고 해도.
그 저택은 라세인이 씁쓸함을 완전히 털어버리고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방법을 찾아가던 중에 발견한 장소였다. 대귀족이 아니면 가질 수 없는 거대한 크기의 저택이 도시와는 한참 떨어진 숲 속에 있다니. 저택의 주인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궁금증을 품으며 저택을 보고 있을 때, 저택의 문이 열리고 한 여성이 저택 밖으로 나왔다. 햇빛을 받아 밤하늘의 달처럼 반짝이는 회색 머리카락을 높이 묶은 안경을 착용한 여성이 라세인의 곁으로 걸어왔다.
입 안을 맴도는 수많은 말 중에서 가장 낫다고 생각해서 준비해놓았던 수상한 사람이 아니라는 말이 여성―아인하르트의 아름다운 눈을 본 순간, 사라졌다. 붉은색 홍채에 비취색 눈동자라니. 보금자리도 없이 제국을 떠돌면서 다양한 사람들과 만났지만 이런 눈을 가진 사람은 눈앞에 있는 아인하르트가 처음이었다.
“길을 잃으셨나요?”
“네, 길을… 잃고 이 저택까지 오고 말았습니다.”
모셨던 신의 이름을 마음속으로 여러 번 외치고 싶은 기분을 참으며 겨우 말을 마친 전직 사제는 주변을 둘러본 아인하르트의 입에서 흘러나온 ‘들어오세요.’라는 말에 잠시 굳었다가, 닫힌 저택의 문을 여는 아인하르트의 곁으로 다가갔다.
“마을은 멀지 않은 곳에 있으니, 그대의 마음만 받겠습니다.”
“곧 마을로 갈 수 없는 날씨가 될 테니까요.”
마을로 갈 수 없는 날씨? 눈썹을 치켜뜨며 하늘을 본 라세인은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이 흐려지는 것을 보았다. 고개를 돌려 아인하르트를 본 라세인은 복잡한 심정으로 문 손잡이를 잡고 자신의 결정을 기다리고 있는 아인하르트의 곁으로 다가갔다.
“날씨가 괜찮아질 때까지만. 그 때까지만 실례하겠습니다.”
두 사람이 들어간 저택 문이 닫혔다. 라세인은 그 소리가 꽤나 크다고 생각했다.
*
목숨을 노리는 추격자는 세상이 더 이상 용사와 그 일행을 찾지 않자 없었던 것처럼 사라졌지만 라세인에게는 그들에게 쫓기며 살았던 시간에 생긴 버릇이 후유증처럼 남아있었다. 저택의 주인인 아인하르트의 제안을 거절하고 마을로 돌아가려던 것도 그 버릇 때문이었다.
라세인의 버릇을 모르고 라세인을 저택의 손님으로 들인 아인하르트는 이 넓은 저택에 혼자만 사는 모양이었다. 다른 분들은 안 계시냐는 질문에 혼자 산다는 대답이 돌아왔을 때, 라세인은 모셨던 신의 이름을 입 밖으로 내뱉고 싶을 정도로 놀랐으나 외투를 벗은 아인하르트의 목에서 달랑이는 목걸이를 보고 그녀가 혼자 사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십자가라 불리는 직사각형 두 개가 겹쳐진 형태의 펜던트가 달린 목걸이를 목에 건 현자. 사람들은 오랫동안 세계를 수호한 그의 지혜를 칭송하며 그를 ‘동쪽에서 온 현자’라고 불렀다. 현재, 세계를 구한 용사가 된 사람들은 라세인과 그의 동료들이었지만 사실 그들은 용사가 아닌 현자를 찾는 사람들이었다. 그의 도움을 받아 세계를 구하기 위해.
두 줄의 기록을 단서로 삼아 떠돌던 때에는 만날 수 없었던 사람이 이곳에 있을 줄은 몰랐다.
라세인은 떠오르는 수많은 의문을 자신에게 아무 것도 물어보지 않고 이 저택에 들인 그녀의 친절을 생각하며 덮은 뒤, 입술을 움직였다.
“라세인 데 루베르니겔입니다.”
“셰르핀 아인하르트. 부르고 싶은 이름으로 부르세요.”
이름 하나. 그 외에는 아무런 정보도 교환하지 않고 라세인은 아인하르트의 뒤를 따랐다. 넓은 그녀의 저택이 혼자 살기에는 참 넓다는 생각을 하며.
하루면 맑아질 거라고 생각했던 날씨는 다음 날에도 궂었다. 눈보라가 잠잠하다면 나갈 생각이었던 라세인의 귀를 “한동안은 그치지 않을 거예요.”라는 아인하르트의 목소리가 두드렸다. 결국 저택 밖으로 나가기를 포기한 라세인은 아인하르트에게 도울 일은 없냐고 물었다. 아무 것도 안 하고 묵으면 자신의 마음이 매우 불편하다는 사실을 피력하며.
부엌에서 아인하르트의 요리를 돕게 된 라세인은 스튜에 들어갈 감자의 껍질을 까며 아인하르트의 뒷모습을 눈에 담았다. 어제와 다르게 양쪽으로 묶여서 흔들리는 머리카락과 스튜의 재료를 써는 검은 장갑을 낀 손. 평범한 20대로 보인다. 이런 아인하르트를 누가 동쪽에서 온 현자라고 생각할까.
감자를 건네자 아인하르트가 고마워요. 라고 말했다. 재료가 들어간 스튜가 끓는 소리를 들으며 라세인은 생각했다. 자신도 그랬지만 그녀 역시 웃지 않았다. 자신과 비슷한 일을 겪어서 웃음을 잃어버린 게 아니길 바라면서 라세인은 스튜가 담긴 냄비를 눈에 담았다. 담지 않으면, 아인하르트를 쳐다볼 것 같아서였다.
아주 오랫동안.
*
-형은 나처럼 살지 마.
황성의 발코니에서 들었던 에르위니아의 마지막 말이 라세인의 잠을 깨웠다. 새벽이었지만 이 꿈을 꾸는 날의 라세인은 깊이 잠들지 못 했다. 주인인 아인하르트에게 폐가 되지 않도록 눈을 감고 방에 얌전히 있으려던 라세인은 복잡해지는 머릿속을 정리하기 위해 결국 침대에서 내려와 복도의 차가운 바람을 쐬기 위해 문을 열었다.
“라세인?”
아인하르트의 깜짝 놀란 표정은 이 저택의 손님방을 차지하게 된 이후로 처음 보는 거라는 생각을 빠르게 머릿속에서 지운 라세인이 입을 열었다.
“좋은 밤이네요, 아인하르트. 놀라게 했다면 미안합니다.”
“놀라지 않았어요. 차를 끓였는데 같이 마실래요?”
혼자 마시기에는 많은 양을 끓여버렸거든요.
자신의 상태가 나빠서 베풀어주는 친절인지 생각하기엔 머릿속이 복잡했다. 제가 같이 마셔도 괜찮다면요. 잠에서 깨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가라앉은 목소리였으나 머릿속의 복잡함은 티나지 않았다.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라세인은 이 저택에 처음 온 날처럼 아인하르트의 뒤를 따라 1층으로 내려갔다.
장작이 타오르는 난로 앞에서 뜨거운 김이 피어오르는 잔을 들고 아인하르트와 나란히 앉은 라세인은 아인하르트의 옆얼굴을 눈에 담았다. 묶지 않은 머리카락. 안경. 그리고 아름다운 보석을 떠올리게 하는 눈동자. 이런 밤이 아니라 아침에 보았더라면 더 좋았을 거란 생각을 했을 때, 라세인은 푸른 눈을 황급히 돌렸다. 나쁜 짓을 하다가 들킨 사람 같은 반응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런 생각은 자신을 친절하게―
“곧 눈이 그칠 거예요.”
이 평화로운 나날의 끝이 올 거라고 말하는 아인하르트의 말을 들은 라세인은 생각을 멈추고 따뜻한 차를 들이켰다. 몇 모금 넘기고 진정한 라세인이 다시 아인하르트를 보았다.
“눈이 그치는군요. 여관이 아닌 곳에서 눈을 피해본 건 이번이 처음이라 그대와의 나날을 잊지 못할 것 같아.”
“집이 없어요?”
“사정이 있어서. 집을 못 샀죠. 신경 쓰고는 있는데 오늘은 반말과 존댓말이 계속 섞이네요. 미안해요. 반말이 익숙해진지 오래라서 그런가 봐요.”
“반말이 편하다면 반말로 해도 괜찮아요.”
아인하르트의 제안을 듣고 잠시 망설이던 라세인이 입술을 열었다. 고마워, 아인하르트. 사실 누군가와 이렇게 대화를 나누는 일도 오랜만이라는 것은 알리지 않았다. 아인하르트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다시 차를 마신 라세인이 아인하르트에게 물었다.
“이 저택은 참 좋은 곳이야.”
“좋은 곳으로 봐줘서 고마워요.”
“그대를 닮아서 좋은 곳이 된 거라고 생각해.”
다양한 경험을 했다고 해도 자신보다 많은 시간을 살지 못한 인간이 한 말을 들은 현자가 처음으로 미소를 지었다. 아인하르트의 미소는 금방 녹아버리는 눈만큼이나 짧은 시간을 머물다가 사라졌지만 라세인은 이 미소가 자신의 머릿속에 오래도록 기억될 거라고 생각했다. 영원히 녹지 않는다는 만년설처럼.
*
떠나는 모습을 아인하르트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아서 눈이 그친 것을 확인하자마자 저택을 나온 라세인은 언제나처럼 제국 여기저기를 떠돌았다. 아무 것도 물어보지 않고 자신을 받아들여준 그 저택과 저택의 주인이 생각날 때면 그녀가 생각나는 보석이 박힌 장신구를 샀다. 마음으로 정한 주인이 있어 자신은 사용할 수 없음에도.
겨울이 끝나고 봄이 왔다. 아직 겨울의 흔적이 남아있는 아인하르트가 사는 저택 근처의 마을에서 또 다시 보석이 박힌 장신구를 산 라세인은 누구한테 줄 거냐고 끈질기게 묻는 상인의 대답을 웃음으로 무마한 뒤, 마을 근처에 있는 저택과 저택의 주인에 대해 물었다. 동쪽에서 온 현자―정체를 숨기고 사는 것 같지만―인 아인하르트라면 언제나처럼 잘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던진 물음이었다.
“그 저택? 주인이 보이지 않는다고 애들이 수군대던데.”
실종된 게 아닐까? 아니면 원래 유령이었을지도!
실종. 그런 일이 일어날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라세인은 결국 그 저택 앞에 섰다. 주인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지 않고 떠나온 저택의 문을 두드렸으나 반응은 없었다. 진짜라니. 아인하르트가 정말로… 상인의 입에서 흘러나온 나쁜 소문을 부정하지 못 하게 된 라세인의 귀에,
“오랜만이네요, 라세인.”
어제 만난 사람에게 하는 인사 같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 목소리의 주인을 확인한 라세인은 목소리의 주인, 아인하르트를 두 눈에 담자마자 그녀를 끌어안는 제 몸을 막지 못 했다. 품 안의 온기를 통해 아인하르트의 존재가 현실임을 깨닫고 상인이 한 말은 소문에 불과했음을 알게 된 라세인이었으나 말보다 먼저 나가버린 몸은 문제였다. 모시는 신의 이름을 마음으로 몇 번 외치고 이성을 되찾은 적진 사제는 사과를 하기 위해 입술을 움직였다. 아니. 움직이려고 했다.
“묵을 곳은 있나요?”
하지만 그가 입술을 움직이는 것보다 아인하르트가 던지는 질문이 귀를 두드리는 게 더 빨랐다. 사과와 대답. 둘을 동시에 하게 된 라세인은 다시 술렁이기 시작한 마음을 조금 더 진정시킨 후, 가장 먼저 해야 할 말을 입에 올렸다.
“갑자기 끌어안아서 미안해. 그리고 난… 어디서든 잘 수 있는 사람이지만 그대만 괜찮다면 이 저택에 다시 한 번 묵고 싶다는 뻔뻔한 말을 하려고 해.”
괜찮을까, 아인?
끌어안았던 팔을 풀고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던진 질문에 아인하르트가 괜찮아요. 라고 대답하며 저택의 문을 열었다. 이 저택의 문이 열린 이유가 날씨가 그때처럼 다시 굳어질지 오랜만의 손님을 다시 만난 아인하르트의 친절인지는 알 수 없었다. 자신만이 아니라 누구도 알 수 없겠지. 이유를 생각하지 않고 그녀의 친절만 받아들이기로 한 라세인은 아인하르트를 계속 따라가는 제 눈을 통해 자신의 마음에 싹이 튼 감정을 깨달았다. 사랑. 이성을 지우고 사람을 뒤흔들어놓지만 끝내 사람을 성장시키고 이 세계를 다채롭게 만드는 감정.
자신의 마음에 사랑을 싹트게 한 소중한 사람을 따라 저택으로 들어오며 라세인은 생각했다. 그동안 구매한 보석이 박힌 장신구를 아인하르트에게 전해주는 순간, 아인하르트가 같이 차를 마셨던 그 날처럼 미소를 지었으면 좋겠다고.
*
르네님이 그려주신 아름다운 연성을 보고 감사와 행복을 담아서 쓴 랏땅아인이 왔습니다.
에유입니다. 판타지 세계관 기반이긴 한데 복잡한 설정은 없어서 편히 보시면 되어요. 늘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려요!^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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