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서
촬영 중에 병이 떨어지는 불운한 사고는 이제 막 빛을 본 리카르도의 인생을 망가뜨렸다. 하필이면 오른손이었다. 오른손. 수술은 성공했지만 재활을 해도 원래의 손으로는 돌아갈 수 없을 거라는 의사의 말이 리카르도는 사형 선고처럼 들렸다. 비치지 않는다고 해도 정상적이지 않은 손으로는 리카르도가 원하는 연기를 마음껏 할 수 없었다. 절망 속에서 리카르도는 얼굴, 목소리만이 아니라 몸 전체가 연기라고 가르쳤던 사람을 생각했다. 양부, 로베르토 스칼리에티. 병석에 누워 죽을 날을 기다리는 그 사람이 범인이었다. 그의 집착을 느끼고 리카르도는 쓰게 웃었다.
갑자기 모든 활동을 중단했음에도 사람들은 리카르도에 대해 궁금해 하지 않았다. 파파라치 하나 정도는 따라다닐 거라고 생각했는데. 리카르도는 모자를 푹 눌러쓴 채 베네치아에게 물의 도시라는 별명을 선물한 물을 바라보았다. 깨끗한 물은 아니었으나 잔잔하게 흐르는 강을 보니 뒤숭숭하던 마음이 편안해졌다. 형씨. 조금 편안해진 리카르도의 마음에 돌을 던진 것은 낯선 목소리였다.
“유리공예품에 관심 있어요?”
아니라고 말하려던 리카르도는 낯선 목소리의 주인이 눈동자를 물들인 색에 대답을 바꿨다. 진한 녹색. 곧 다가올 여름이 청년의 눈동자에 있었다. 환히 웃는 얼굴이 마지막 드라마에서 상대역으로 만났던 배우보다 눈이 갔다. 멋진 물건이라면 관심을 가지겠지. 무척 멋진 물건이라고 말하면서 청년, 파비앙 모로는 휴대폰을 꺼냈다. 사진을 키워서 보여주고 장점을 말하는 그의 목소리에 리카르도는 귀를 기울이다 그를 따라가기로 했다.
구매한 무척 비싼 유리공예품을 선물로 받자 파비앙은 얼굴을 찡그렸다. 가게 주인에게 괜한 오해를 받을지 모른다는 상황이 싫은 모양이었다. 리카르도는 그 찡그려진 얼굴을 보고 웃음을 터뜨렸다. 파비앙의 표정은 다채로웠다. 리카르도가 지으려고 관찰했던 사람들의 수많은 표정을 전부 그의 얼굴이 가지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웃지 말아요. 그 물건, 형씨가 사려고 했잖아요.”
“그대에게 선물하고 싶었어.”
“이름도 모르는데? 이상한 형씨네~”
“리카르도 스칼리에티.”
이름을 말해주고 기다리자 파비앙 모로. 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리카르도는 유리로 만들어진 토끼와 눈 결정체 모양 몇 개로 만들어진 오르골을 결국 자신에게 돌려주지 못 하고 가지게 된 파비앙이 입술을 움직여 건넨 감사의 인사를 들었다. 고마워요. 이것이 그의 일인지 아닌지 물어보려던 리카르도는 다른 것을 제안하기로 했다.
“시간이 있다면 나를 도와줄 수 있겠나?”
돈은 그대가 원하는 만큼 지불하지, 파비앙.
세게 불러도 좋다고 덧붙이자 파비앙은 의심스러운 눈을 보냈지만 리카르도의 제안을 수락했다. 텔레비전이나 극장의 무대에서는 이제 막 빛을 본 연기자였으나 리카르도는 돈이 많았다. 양부인 로베르토가 남길 유산 역시 리카르도의 것이었다. 설령 로베르토가 자신을 더 절벽으로 몰아넣기 위해 유언장을 고쳐 쓰더라도 양부의 변호사를 매수한 지금, 리카르도가 걱정할 일은 없었다. 좋아요. 아, 말 놔도 되나? 불편다고 말하면서 물어오는 파비앙에게 리카르도는 고개를 끄덕였다.
파비앙의 도움을 받아 구입한 집에 파비앙은 자주 들렀다. 마치 자기 집처럼 들르는 파비앙에게 리카르도는 열쇠를 선물했다. 경계심이 없다고 말하면서도 파비앙은 리카르도가 건네주는 열쇠를 거절하지 않았다. 또 한 명의 집주인이 된 파비앙은 리카르도가 선물한 오르골을 아직 제대로 채우지 않은 장식장에 놓고 방 하나를 차지했다.
“내일이면 이사를 오겠군.”
“리카르도가 바라면 생각해볼게.”
농담으로 던진 말이었을 것이다. 리카르도 역시 농담으로 받아주려다 소파에 누워있는 파비앙의 곁으로 다가갔다. 거리가 가까워지자 소파에 앉은 파비앙이 리카르도의 머리카락을 손을 만지작거렸다. 이 관계에는 이름이 없었다. 리카르도는 재활을 했지만 예전처럼 물건을 쥐기에는 아직 힘든 제 오른손과는 달리 자유롭게 움직이는 파비앙의 오른손을 바라보다 자신의 왼손을 가져가 파비앙의 손을 잡았다.
“왼손잡이야?”
“오른손이 영원히 안 낫게 된다면 그렇게 되겠지.”
“나았으면 좋겠어.”
네 손, 정말 예쁜 손이라고.
이름과 베네치아에서 산다는 것. 그리고 추측되는 나이만이 알고 있는 것의 전부인 청년의 얼굴에 리카르도는 자신의 얼굴을 가까이 했다. 입술과 입술이 겹치고 혀와 혀가 만났다. 이 순간을 기다렸다는 것처럼 뒤엉키는 혀와 타액이 리카르도의 욕망을 부추겼다. 파비앙. 파비앙. 낮아진 목소리로 이름을 부르며 리카르도는 소파에 누운 파비앙을 보았다. 리카르도를 올려다보던 파비앙이 리카르도의 목을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나도 너를, 원해.
“누구를 원하지?”
“리카르도.”
허락의 말이었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파비앙이 더 깊이 잠들 수 있도록 이불을 덮어주고 방 밖으로 나온 리카르도는 서재로 향했다. 베네치아의 집에 놓인 그의 서재에는 책상 역시 놓여있었다. 손이 다 나아지면 쓰기 위해서 샀지만 지금까지 아무 것도 쓰지 못한 볼펜과 새하얀 종이 한 장을 꺼낸 리카르도는 예전보다 떨림이 덜한 손으로 새하얀 종이에 글씨를 쓰기 시작했다. 새하얀 종이에는 파비앙에 대한 마음이 담기기 시작했다. 겨우 알아볼 수 있는 예전보다 못 생긴 글씨로 완성된 첫 장의 편지를 리카르도는 망설임 없이 구겼다.
두 번째도, 세 번째도 구겼다. 손의 떨림은 점점 더 심해졌지만 리카르도는 견뎌낼 수 있었다. 마침내 예전보다는 예쁘지 않아도 알아볼 수 있는 깔끔한 글씨의 편지를 완성한 리카르도는 편지를 파비앙의 휴대폰 옆에 놔둔 뒤, 시간이 흘러 좀 식어버린 파비앙의 옆자리에 누웠다.
“아침, 이야?”
물어오는 파비앙을 끌어안고 입 맞추며 리카르도는 속삭였다. 더 자도 돼. 리카르도가 사랑하는 청년은 눈을 감았다. 아침에 보게 될 연서의 존재를 모르는 파비앙을 품에 끌어안고 리카르도도 눈을 감았다. 언젠가 오른손이 떨리지 않게 되는 날에,
더 멋진 편지를 파비앙에게 줄 수 있길 바라며.
*
리칼파뱡 6주년 축하합니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오늘은 리칼파뱡의 6주년! 6년을 기념하는 이야기를 뭘로 쓸까 고민했는데 갑자기 편지가 떠오르더라고. 예전에 랑이가 기념일 연성으로 써준 파뱡이 리카르도에게 보내는 편지가 생각나서 그랬던 거 같아. 그 연성 이후로 리카르도가 파뱡 편지 가지고 다닌다는 변화가 추가되기도 했고. 그런 변화를 추가해서 언젠가 편지 소재의 이야기는 꼭 쓰고 싶었는데 기회가 와서 냉큼 얌냠하였습니다. 즐겁게 읽어주길 바라^ㅇ^
6년이란 긴 시간을 함께 해줘서 고마워. 앞으로도 잘 부탁해! 오늘도 랑이사랑파뱡사랑. 네로랑 나단도 사랑. 다들 사랑합니다. 와라라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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