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성

끝과 시작의 경계에서

<span class="sv_member">에메트</span>
에메트 @acidcatsle
2026-02-07 16:44

아카르 르 메르바하가 하는 일은 인간을 사랑하는 신이 인간을 구하기 위해 고안한 수많은 방법들 중 하나였다대가를 받고 소원을 이뤄준다기적이라 불리는 일은 할 수 없도록 대가라는 제약을 걸었으나불법을 행하는 자도 있는 모양이었다제약을 무시하는 위험한 행위가 자신의 목을 조른다는 사실을 잘 아는 아카르는자신의 모든 것을 주고 싶으나 줄 수 없는 신의 불행한 사랑을 연민하며 자신의 가게에 찾아온 인간의 소원을 들어주었다.

 

월요일에 찾아온 첫 사랑을 이루고 싶은 인간에게는 지금까지 쓴 원고를 받았다.

화요일에 찾아온 심한 불면증으로 고통 받는 인간에게는 아침에 생길 인연을 받았다.

수요일에 찾아온 자신의 잘못을 덮고 싶은 인간에게는 두려움을 받았다.

그들의 소원은 이뤄지지만 아카르가 받은 대가는 이 순간의 대가임을 인간들은 몰랐다왜 모를까라고 묻는 네로를 보며 아카르는 웃었다네로는 여름이라고 느끼기 힘들 정도로 상쾌했던 어느 오후가게에 들어온 방문자였다인간의 소원만을 들어줄 수 있었기에 손님으로 부를 수 없는 네로가 소파에 앉자 아카르는 깔끔하게 꾸민 가게를 둘러보는 네로에게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소원이 있나요그대?

-없어.

 

손님은 아니었으나 가게에 들어온 사람에게 없다는 대답을 들을 것이라는 예상을 하지 못한 아카르가 웃음을 터뜨리자 네로는 녹색 눈으로 아카르의 검붉은 눈을 보았다왜 웃어이상한 거야아카르는 고개를 저었다이상한 일은 아니었다인간이 아니더라도 이 가게에 올 정도로 이루고 싶은 소원은 없는 쪽이 좋았다대가라는 제약을 뒀지만 신은 물렀다이루고 싶은 소원을 이루고도 만족하지 못한 자들이 이 가게에 접근하지 못 하게 만드는 제약은 걸어두지 않았던 것이다반은 신이지만 반은 마족이었던 아카르는 자신에게 내려진 명령을 착실히 따르면서도 인간의 파멸만은 막지 않았다.

 

부유해지고 싶다는 소원을 이루기 위해 자신의 수명을 바쳤던 인간이 생각났다눈에 보이지 않는 수명의 무게를 깨닫지 못한 인간은 마지막 수명을 건넨 뒤가게를 나갔다그리고 다시 가게로 방문하지 않았다확인하지 않아도 인간이 죽었다는 것을 직감한 아카르는 그 날하늘에서 떨어지는 비를 보며 쓰게 웃었다비는 신이 흘리는 눈물이었다자신의 무덤을 파는 인간도 사랑하는 신은 인간들을 구하지 못한 날이면 저렇게 울어댔다.

 

오늘도 비가 오네.”

 

소파에 앉아있던 네로가 창을 두드리는 빗소리를 듣고 꺼낸 말을 들은 아카르는 울보거든요라고 중얼거린 뒤네로의 손을 잡았다아직 어린 악마인 네로의 손은 아카르의 손에 비해 작았으나 처음 만났을 때에 비해서는 많이 커져있었다시간이 흐르고 있다는 증거였다.

 

시간이 빠르네요그대의 손이 벌써 이 정도로 커지다니.”

키도 커졌어.”

이따 재볼까요?”

손님 올 텐데?”

닫았어요.”

아카르는 이 일 싫어하는 것 같아.”

.”

 

안 맞아요.

아카르는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많은 신이 인간을 사랑했지만 반은 신이고반은 마족인 아카르는 다른 신들과 다르게 인간을 사랑하지 않았다애초에 마왕인 상관이 시킨 명령이 아니었다면 하지도 않았을 일을 오래도 했다슬슬 그만두려고요어디로 가라고 묻는 듯한 표정을 짓는 네로의 얼굴에 담겨있는 감정에 뒤섞인 작은 불안을 아카르는 놓치지 않았다아카르는 그 작은 불안을 녹여주듯 네로의 뺨에 입을 맞췄다가벼운 입맞춤을 받은 네로에게 아카르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속삭였다.

 

나갈까요네로?”

 

비가 그친 후에도 나아지지 않는 여름의 습한 공기는 밤에도 호흡을 힘들게 한다호흡하고 사는 인간이었다면 이 공기를 들이마시고 물에 잠긴 물고기가 된 기분을 느꼈으리라벤치에 앉은 마족과 악마는 평소보다 작은 달을 바라보다 편의점에서 구매한 캔맥주를 땄다아카르가 건넨 캔맥주를 받은 네로가 맥주를 한 모금 마시며 중얼거렸다.

 

인간 같아.”

하지만 아니죠가게는 답답해서 편하게 말하고 싶은 장소가 좋을 것 같아서 나왔는데 마음에 들어요?”

아카르가 있는 곳은 어디든 좋아그래서 가게를…

관둘 테지만 네로를 데려가지 않을 거라고 말한 적은 없어요아니면 나랑 같이 가는 게 싫은가요그대?”

 

그럴 리가 없잖아아카르랑 같이 가고 싶어라고 대답하며 네로는 두 팔로 아카르의 목을 끌어안았다신이 뿌린 슬픔의 눈물 속에서 아카르는 네로를 끌어안았다지금 이 순간은 약간 이해가 된다신의 사랑이평생 이해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한 사랑이반이 신이라서가 아니라 제 품에 안긴 이 어린 악마가 소중해서 이해한 것임을 잘 아는 마족은 어린 악마를 제 무릎에 앉혔다자신의 캔맥주를 따서 무릎에 앉은 네로가 한 모금 마시고 손에 든 캔맥주와 가볍게 부딪힌 아카르는 손에 든 캔맥주를 들이켰다여름의 더위를 달래기에 딱 좋은 술이었다얼마 전에 가게에 방문한 손님에게 대가로 받은 원고가 생각났다.

 

대가로 주는 원고는 영원히 발표하지 못 하는 원고가 되어버렸지만 그 손님은 가게를 나가는 순간에도 포기하지 않겠다고 했다세상에는 그런 인간도 있다신의 사랑을 받기에 충분한 인간그런 인간들을 좀 더 많이 만났다면 이 일도 재미있었겠지만 아쉽게도 많이 만나기 전에 더 재미있는 존재가 나타났다소원이 없지만 세계에 대해 궁금하게 생각하고자신에 대해 더 알고 싶은 욕망으로 가득한 작은 악마네로라는 이름의 작은 악마의 맥주를 마시는 소리가 아카르의 귀를 두드렸다.

 

오늘을 영원히 기억하게 만들 소리라고 생각하며 아카르는 네로의 손을 쥐었다처음 만났을 때보다 커진 작은 손에 키스하며 아카르는 생각했다소원이 없다고 말하는 네로가 언젠가소원이 있다고 말하며 욕심을 내줬으면 좋겠다.

 

그 날이 온다면 나는 무슨 짓이든 해서 그대의 소원을 이뤄줄 텐데.

 

살아온 시간으로도 숨길 수 없는 욕망을 담아 아카르는 고개를 숙였다입맞춤은 캔맥주의 기포가 다 사라질 때까지 끝나지 않았다.



*

28일에 올렸지만! 7월 29일에 500일인 아카네로의 500일을 축하합니다.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에유입니다. 수상수상스트 가게를 운영하는 아카르와 소원이 없는 네로를 써봤는데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다. 개인 세계관에도 수상수상스트 가게가 있긴 한데 그 가게랑은 좀 차이가 있음. 그 가게를 모티브로 쓰긴 했는데. 아카르가 좀 나쁜 사람입미다. 그치만 네로는 항상 좋아하고 사랑한다. 마지막을 넘 쓰고 싶었어. 캔맥주 마시는 거랑 키스. 여름 느낌 나게.<<

500일이란 긴 시간을 함께해줘서 고맙고 앞으로도 잘 부탁합니다~!! 랑이사랑네로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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