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은 사랑의 계절
호전적인 성격 탓인지 어렸을 때부터 아쉐리카에게는 불 같다는 소리가 따라다녔다. 네 언니랑 너를 반반 섞으면 좋겠다는 말로 잔소리를 끝내려던 어머니의 모습에 입술 사이로 새어나간 퉁명스러운 대꾸가 원인이었을까. 다음 날, 아쉐리카는 여행에서 사용하기 위해 구매한 캐리어와 함께 비행기를 탔다. 아쉐리카가 탄 비행기는 긴 시간을 날아 한국이라는 땅에 도착했다. 태어난 나라도 아닌 한국을 자신의 나라처럼 생각하며 한국에서 보금자리를 만든 조부가 캐리어만 들고 날아온 아쉐리카를 반겼다.
화가 나겠지만. 이라는 말로 시작한 조부의 이야기를 통해 아쉐리카는 자신이 1년간 말도 통하지 않는 낯선 땅에서 생활해야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아쉐리카는 자신이 처한 상황에 울지도, 화내지도 않았다. 불 같다는 소리가 따라다니는 손녀의 반응에 조부가 웃으며 말했다.
“일주일은 아무 것도 생각하지 말고 쉬렴.”
조부는 네 엄마나 아빠가 돌아오라고 해도 네가 바라면 더 있어도 된다는 말을 덧붙였다. 아쉐리카는 알았어요. 라고 말하고 깨끗하게 청소된 자신의 방에 누웠다. 본가에 있는 자신의 방보다 작았지만 침대는 푹신했다.
다음 날, 이야기도 하지 않은 채로 타국으로 보내놓고도 걱정이 된 엄마의 전화가 걸려왔다. 미안하다는 말이 반을 차지하는 전화를 받고도 아쉐리카는 덤덤했다. 덤덤한 목소리로 반년이든 1년이든 있다가 가겠다고 했더니 엄마는 정말이냐고 몇 번이나 물었다. 그럼 바로 돌아갈 거라고 생각했냐고 대꾸하고 싶었지만, 아까 전에 들은 미안하다는 말들이 아쉐리카를 진정시켰다. 통화가 끝났다. 지친 표정으로 방 밖으로 나온 아쉐리카는, 사용인의 도움을 받으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이곳에서 얼마간 살아야 하니 갈증을 달랠 수 있는 물이 어디 있는지는 직접 확인하기로 한 그녀는 부엌으로 향하다가 검은 머리카락의 소년을 보고 걸음을 멈췄다. 걸음을 멈춘 아쉐리카를 소년이 검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새까만 래브라도 리트리버를 떠올리는 게 일반적이겠지만 아쉐리카가 소년을 보며 떠올린 것은 사모예드였다. 복슬복슬한 털이 꼭 구름을 연상시키는 사모예드를 닮은 소년은 가볍게 고개를 숙인 뒤, 발소리를 내지 않고 걸어갔다.
“이름도 안 말하고 가버렸네.”
이름 정도는 말해주지. 하고 투덜거리며 아쉐리카는 제 목적지인 부엌으로 향하는 걸음을 재개했다.
*
여운하. 부엌으로 향하던 아쉐리카가 복도에서 마주친 소년의 이름이었다. 아쉐리카의 조부는 운하를 자신의 친구라고 소개했다. 조부는 아는 사람 한 명도 없는 이 땅에서도 파티를 벌인 모양이었다. 운하는 초대장을 받고 찾아온 가족 중의 한 명이었다. 누나인 것 같은 두 명의 소녀와 형인 것 같은 한 명의 소년과 어울리며 조용히 있던 소년이 클래식을 그렇게 잘 알 거라고 생각하지 못 했다며 웃는 조부는 운하를 무척 좋아하는 것 같았다.
말이라도 한번 걸어봐야겠다고 생각한 아쉐리카가 자신의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는 날은 생각보다 빠르게 찾아왔다. 검은 눈과 호박색 눈이 마주쳤다. 웃은 운하는 오늘도 아쉐리카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말로 인사해.”
“한국어네요. 할 수 있어요?”
“조금. 하지만 빠르게 말하면 못 알아들어.”
“그럼 천천히 말할게요. 혹시 한국어로 말하기 힘들면 말해줘요.”
영어를 할 수 있다는 소리를 한국어로 말하기 힘들면 말해달라는 말로 표현하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낯선 땅에서 받은 배려가 마음에 든 아쉐리카는 오랜만에 소리를 내어서 웃다가 손을 내밀었다.
“웃어서 미안. 당신처럼 다정한 배려를 해주는 사람은 오랜만이라 기분 좋아서 웃은 거니까 오해하지 말아줘. 나는 아쉐리카야.”
“여운하예요. 쉐리 씨라고 불러도 될까요?”
“보통은 데미라고 부르지만 쉐리 씨라고 불리는 것도 나쁘지 않겠네.”
복도에서 계속 이야기를 나누는 것보다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는 게 낫다고 생각한 아쉐리카는 차를 마시자고 제안했다. 고개를 끄덕이며 수락한 운하와 응접실로 향한 아쉐리카는 사용인이 가져온 차를 들었다. 몇 번 마셔보았지만 여전히 적응이 되지 않는 풀색의 차가 찻잔 안에서 찰랑였다.
“녹차야.”
“녹차 좋아해요?”
“맛있으면. 엄마랑 싸우지 않았으면 이 차도 맛보지 못 했겠지.”
“싸웠군요.”
“엄마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도 자주 싸워. 이렇게 평온하게 대화하는 건 당신이 처음이야.”
“영광인데요. 쉐리 씨가 안 싸우는 사람이라니.”
당신이 착한 사람이라서 그렇다고 대답하려던 입술을 아쉐리카는 의아함을 느끼며 다물었다. 착한 사람이라서 안 싸운 적은 없다. 가족도, 친구도 이유가 생기면 아쉐리카는 주저하지 않았다. 그런데 눈앞의 소년, 운하에게는 왜 그런 기분이 생기지 않는 걸까. 충격을 받아 캐리어 하나 들고 쫓겨날 성미가 죽었다고 하기는 무리가 많다. 어제 통화하던 언니와도 싸웠으니까. 이유를 알 수 없는 아쉐리카는 찻잔을 들었다.
“왜 두 번 밖에 만나지 못한 당신이 그런 사람이 됐는지 모르겠어.”
하지만 나쁘지 않네.
대답하며 삼킨 녹차는 약간 식긴 했지만 마시기에 적당한 온도였다. 뜨겁게 끓여진 탓이리라. 따뜻한 차가 잘 어울리는 계절의 바람 속에서 아쉐리카는 운하와 많은 대화를 나눴다. 손을 흔들며 돌아가는 운하를 배웅하고 방으로 돌아간 아쉐리카는 침대에 누워 생각했다. 가족과의 갑작스러운 이별에서도 느끼지 못한 이 진한 아쉬움이 무엇인지. 해답을 낼 수 없었던 아쉐리카는 짜증을 담아 앞머리를 매만졌다.
“여운하.”
동글동글하고 부드러운 발음을 가진 그 이름의 주인에게 자신이 품은 감정이 사랑이며 운하를 만나 변화가 찾아오고 있음을 아쉐리카는 몰랐다. 가을이었다. 따뜻한 차가 마시고 싶은 낙엽의 계절. 다음에는 정원이라도 산책하자고 제안할까. 라고 중얼거리며 아쉐리카는 웃었다.
“기분 좋은 일 있어요?”
가을의 낙엽이 떠올리게 한 과거를 더듬다가 느낀 기쁨이 얼굴에도 드러난 모양이다. 평소의 아쉐리카라면 하지 않을 행동이었음에도 운하는 그것을 이상하게 보지 않고 받아들였다. 운하는 아쉐리카의 어떤 모습이든 받아들였다. 처음 만난 그때나 성인이 된 지금이나. 아쉐리카는 그 점을 사랑했다. 그래서 이 나라를 떠나던 날, 슬픔을 드러내며 우는 대신 운하의 곁으로 반드시 돌아오겠다고 약속했다. 누군가는 어린 날에 한 두 사람의 약속이 지켜지지 않을 거라고 코웃음을 쳤지만 약속은 지켜졌다. 그리고 두 사람은 약속을 지킨 날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연인이 되었다.
아쉐리카는 건너편에 앉은 운하의 손에 제 손을 얹었다. 약속을 지키기 위해 돌아가면 절대로 떼어놓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던 온기가 아쉐리카의 손에 닿아있었다.
“있지.”
지금 내 앞에 여운하가 있다는 것. 기분 좋은 일이잖아.
질문에 대답한 아쉐리카는 자신을 보며 웃는 운하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손등에 닿은 아쉐리카의 입술은 선선한 가을의 바람이 땅에 떨어진 낙엽들을 먼 곳으로 여행 보내는 그 순간에도 떨어지지 않았다.
*
세하의 생일을 축하합니다!^3^
가을이 이제 얼마 안 남았길래 AU로 운하쉐리의 가을 이야기를 써봤어. 어린 쉐리는 몇 번 말고 안 써봐서 낯설지만 그렇지만 세하가 보기엔 귀여웠음 좋겠다. 그래도 작아도 쉐리는 쉐리인 거 같지...? ㅋㅋㅋㅋㅋㅋㅋ o>-<
맛있는거 많이많이 먹고 행복한 하루 보내길 바라! 생일 다시 한 번 축하해.uㅅ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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