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혹의 시간
리카르도 스칼리에티가 은행가라는 직업을 선택한 이유에는 로베르토 스칼리에티의 양자라는 환경과 그에 대한 감정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지만, 다른 길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주어졌다고 해도 은행가를 했을 거라고 생각했을 정도로 리카르도는 은행가라는 직업이 천성인 사람이었다.
작은 돈과 작은 돈. 혹은 커다란 돈과 커다란 돈이 오가는 이 직업은 리카르도 스칼리에티를 다듬었다. 원석이 세공을 통해 보석으로 변하듯 시간과 경험을 통해 잘 다듬어진 리카르도였으나, 천성이 은행가라고 생각하는 그도 은행보다 더 소중한 것을 선택하는 때가 있었다.
“이 가면은 어때, 리카르도?”
어울려? 라고 덧붙이는 파비앙 모로가 리카르도 스칼리에티가 은행보다 더 소중하게 생각하는 존재였다. 두 번째로 쓴 가면과 다르게 얼굴을 반만 가리는 세 번째 가면을 얼굴에 쓰는 파비앙을 보던 리카르도는 몸을 일으켜 파비앙에게로 다가갔다. 뱀파이어 특유의 체향을 더욱 선명히 느낄 수 있는 거리에서 손을 뻗어 얼굴을 매만지자 파비앙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파비앙이 좋아하고 사랑하는 사과와 같은 빛깔이 된 얼굴을 두 눈과 앞으로도 오랫동안 이어질 자신의 인생에 새기던 리카르도의 손이 파비앙의 턱을 잡았다. 진녹색 눈이 리카르도의 눈과 닿았다. 두려움이 보이지 않는 것을 확인한 리카르도는 제 손이 잡은 파비앙의 턱을 조심스럽게 들었다.
“무척 잘 어울려서 그대의 입술에 입 맞추고 싶어져, 파비앙.”
“그럼 옷을 고르는 일이 미뤄진다고~”
적극적으로 자신을 말리지 않는 파비앙의 입술에 리카르도는 입을 맞췄다. 리카르도를 환영하듯 열린 파비앙의 입술에 리카르도는 자신의 열기와 숨결을 모조리 부어넣었다. 중요한 고객과의 거래는 없는 날이었지만 만약 있는 날이었더라도 스케줄을 조정해서 선택했을 연인의 팔이 리카르도의 목을 휘감았다. 자신의 목을 휘감은 팔 안에 갇힌 채로 리카르도는 젖은 입술을 떼어냈다. 가면 때문에 파비앙의 맨 얼굴을 보지 못 하는 것이 아쉬웠던 리카르도가 입술을 떼어내는 바람에 멀어졌던 얼굴을 가까이 해서 파비앙의 가면 끝을 제 입에 물었다. 리카르도가 입에서 힘을 빼자 파비앙의 얼굴을 가리던 가면이 툭. 하는 소리와 함께 바닥으로 떨어졌다.
“잘못하면 밟겠어.”
“밟아서 망가지면 새로 사지. 내게도, 그대에게도 이런 가면을 새로 살 돈은 있어.”
“알아. 그런데 왜 가면을 벗긴 거야?”
“내 입으로 그 이유를 듣고 싶나?”
“이유를 몰라서 말이야~”
“그대의 얼굴을 보고 싶어서 벗겼어.”
가면을 벗긴 이유를 눈치 챘으면서 이유를 들려달라고 하는 파비앙에게 리카르도는 자신이 가면을 벗긴 이유를 분명하게 전했다. 굳이 포장하거나 예쁘게 내려고 애쓰지 않아도 많은 사람들에게 호감을 사는 목소리가 사랑을 담아 파비앙의 귀를 두드렸다. 못 들었다는 핑계를 댈 수 없을 정도로 분명하게 닿아온 이유에 기분이 좋아진 파비앙이 웃는 얼굴을 리카르도는 가만히 바라보았다.
“오늘이 여름의 마지막 날이군.”
“맞아. 리카르도는 가을에 하고 싶은 일 없어?”
“그대가 하고 싶은 일이라면 전부 하겠지.”
“그건 내가 하고 싶은 일이고, 리카르도가 하고 싶은 일이 아니잖아.”
말해봐.
대답을 재촉하는 파비앙을 보던 리카르도는 파비앙을 끌어안은 손으로 그의 등을 쓸었다. 갑작스런 손길에 움찔거리는 파비앙을 보며 리카르도가 입술을 움직였다. 집에 틀어박혀서 이런 일을 하는 것도 좋겠지. 순화해서 표현했지만 알아들은 파비앙이 열기를 담은 눈으로 리카르도를 보았다. 아직은 참을 수 있는 것인지 파비앙은 아까 전의 입맞춤으로 젖은 입술을 달싹이며 더 없어? 라고 물었다. 리카르도가 조금, 심술을 부리고 싶어진 것은 그 질문을 들은 순간이었다. 어떻게 더 심술을 부릴지 생각하던 리카르도는 아까 전의 손길보다 느릿한 속도로 파비앙의 등을 쓸었다.
“내 옆에 누워서 꿈나라로 갈 준비를 하는 그대에게 책을 읽어달라고 할 거야.”
“어떤 책이야?”
“어려운 책은 아니야. 그대도 좋아할 책이지.”
“내용이 궁금하네.”
“사랑이 짙게 녹아있는 소설이지. 몇몇 사람들은 야하다고 평하더군.”
심술을 부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챈 파비앙이 이름을 부르기 위해 입술을 움직이는 것보다 리카르도가 파비앙의 입술을 막는 것이 빨랐다. 가면을 쓰고 했던 아까 전과는 비교도 안 되는 진한 입맞춤을 나누기 시작한 두 뱀파이어의 발치에서 구르던 가면이 소리를 내며 망가졌다. 망가진 가면의 잔해들을 무시한 두 뱀파이어의 몸이 바닥으로 쓰러졌다. 파비앙의 몸 아래에 깔리게 된 리카르도가 파비앙을 올려다보았다. 누군가를 볼 때는 내려다보는 것보다 올려다보는 것을 좋아하는 리카르도였지만 이 눈을 보면 올려다보는 것도, 내려다보는 것도 상관하지 않게 된다. 은행가라는 직업이 제 천성이었던 현실보다 더 운명으로 느껴지는 상대를 올려다보는 현실 속에서 리카르도는, 자신의 옷에 손을 가져가는 파비앙을 지켜보았다.
“도와줄 생각은 없지?”
“알면서 묻는군, 파비앙.”
“왜 심술을 부리는 거야.”
내가 너에게 약하다는 사실을 잘 알잖아. 이런 말을 들을 때는 모든 것을 다 잊고 이 세계에 둘만 존재했으면 좋겠다는 무서운 상상을 한다. 오랫동안 살았던 물의 도시를 도망쳐 둘만의 세계를 만들어가고 있는 중인데도. 리카르도는 손을 뻗어서 자신에게 약하다고 말하는 연인의 얼굴을 감싼 뒤, 천천히 숙이게 했다. 입술과 입술이 만났다. 폭력적이기까지 한 아까 전과는 다른 부드러운 입맞춤을 끝낸 리카르도는 파비앙을 자신의 아래에 눕혔다. 긴 머리카락이 아래로 떨어져 베일처럼 리카르도의 손에 드러나기 시작한 파비앙의 몸을 가렸다.
“나도 그대에게 약하지.”
파비앙은 그 말을 부정하지 않고 리카르도의 손을 잡았다. 자신의 손길에 반응하지 않고 참았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부린 심술은 이제 끝났으니 지금부터는 자신이 사랑하는 이 손의 주인이 바라는 대로 해줄 생각이었다.
“그럼.”
안아줘.
포장하지 않아도 달콤한 목소리가 리카르도의 귀를 두드렸다. 리카르도는 파비앙의 더 달콤한 목소리를 바라며 고개를 숙였다. 여름의 태양보다 뜨거운 열기가,
두 뱀파이어를 감쌌다.
*
리칼파뱡 2300일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축하합니다~!
오늘은 에유가 아닌 오피셜입니당. 사실 기념일 당일에 올릴 글이라도 코멘트는 미리 쓰고 있어가지고 지금 빗소리를 들으면서 쓰고 있는데 빗소리 때문인지 파뱡이 많이 생각나고 그러네.
전연령인데도 그렇고 그런 느낌 팍팍 나는 글에 도전해봤는데 제대로 쓴 건지 모르겠다. 부디 나한테만이 아니라 이 글을 읽는 랑이한테도 그런 느낌이 팍팍팍 나길 바라.^.T
2300일이란 긴 시간을 함께해줘서 고맙고 앞으로도 잘 부탁해. 오늘도 랑이사랑파뱡사랑~! 여름의 끝이 기념일이라니 너무 특별하고 설렌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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