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 못 이루는 밤
01.
티켓을 구매하고 극장에서 관람하는 영화도 나쁘지 않았지만, 이번에 개봉한 영화들 중에는 마음에 드는 영화가 없었다. 블루레이로 사서 볼까요? 질문을 들은 클레어가 그래요. 하고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셨다. 냉장고에 넣어둔 귀여운 얼음틀이 탄생시킨 북극곰이 클레어의 아메리카노가 담긴 벽과 부딪혔다. 가져온 노트북을 자신과 클레어가 앉은 테이블의 중앙에 내려놓은 그리젤다는 노트북의 전원을 켜고, 인터넷 창을 열었다. 설정해둔 첫 번째 페이지에서 두 사람을 서로를 보았다.
“리제, 타이타닉 본 적 있어요?”
“아주 어렸을 적에 봤지. 클레어는 봤어요?”
“봤지만 리제랑 본 적은 없으니까 리제만 괜찮다면 보고 싶네요.”
긍정의 대답을 인터넷 창에 글씨로 적고 엔터를 누르자 오래 전에 개봉한 유명한 로맨스 영화의 블루레이 디스크가 떴다. 한정판의 구매를 마친 그리젤다는 클레어를 보았다. 클레어는 자신을 가만히 바라보던 그리젤다가 웃으며 한 칭찬해줘. 라는 말에 손을 들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담긴 잔을 쥐어서 체온이 낮은 클레어의 손이 그리젤다의 머리에 닿았다. 쓰다듬을 받으며 그리젤다는 생각했다. 클레어에게 부리는 어리광은 형제가 없어서 부모님께 부리던 어리광과는 달랐다. 많은 욕심을 만드는 어리광이었다. 그 어리광의 기반이 소유욕이라는 사실을 아는 그리젤다가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다 조심스럽게 떨어지는 클레어의 손을 잡아 자신 쪽으로 끌어왔다.
“난 타이타닉에서 이 장면이 좋았어요. 남자 주인공이 여자 주인공의 손에 키스하는 장면.”
어릴 적이라 기억에 선명하게 남아있지는 않은 장면을 제멋대로 따라하자 손등에 키스를 받은 클레어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입술은 떼어냈지만 손은 떼어내지 않은 그리젤다를 보던 클레어는 의자에서 일어나 그리젤다의 곁으로 다가갔다. 가벼운 접촉으로 시작된 입맞춤이 깊어지고 호흡이 뜨거워졌을 때, 어린 연인은 이 스킨십이 입맞춤만으로는 끝날 수 없음을 깨달았다. 약속한 신호를 나눈 뒤, 두 사람은 방으로 향했다.
사랑하는 연인을 소유하기 위해.
02.
타이타닉은 어렸을 적에 본 것보다 멋진 영화였다. 이 영화를 보자고 제안한 클레어의 뺨에 키스한 그리젤다는 키스를 받은 클레어의 귀에 속삭였다. 선물로 오늘 저녁은 내가 할게요. 먹고 싶은 메뉴를 말해달라고 덧붙이며 아가씨. 라고 부르자 클레어가 웃음을 터뜨렸다. 웃던 클레어는 그리젤다의 손을 잡았다.
“리제가 만들어주는 음식은 어떤 음식이든 좋아요.”
“클레어가 먹고 싶은 음식을 만들고 싶은 요리사를 곤란하게 만드는 대답인데.”
“곤란해요?”
“농담이에요. 그래도 리퀘스트가 있는 쪽이 좋아. 오늘 만드는 저녁은 선물이니까.”
“그럼, 파스타로 부탁할게요.”
“맛있는 파스타를 만들면 오늘도 칭찬해줄래?”
칭찬은 생각보다 빠르게 그리젤다의 뺨에 닿았다. 조심스럽게 닿았다가 떨어지는 입술에 요리를 뒤로 미루고 클레어를 끌어안고 싶은 충동을 참은 그리젤다는, 냉장고로 향해 맛있는 파스타로 완성될 재료들을 꺼내 부엌으로 향했다. 예전보다 익숙해진 칼질로 다듬어진 재료와 면을 팬에 넣고 소스와 함께 볶자 먹음직스러운 파스타가 완성되었다.
접시에 나눠서 담은 파스타와 냉장고에 있던 재료들로 만든 샐러드가 오늘의 저녁이었다. 그리젤다가 클레어와 함께 오면서 구매한 샴페인을 잔에 따라 클레어에게 건넸다. 클레어의 손에 들린 잔과 그리젤다의 손에 들린 잔이 부딪히는 소리가 테이블을 울렸다.
“샴페인이라 얼음은 못 담겠네요.”
“오늘 마시는 샴페인에는 쓸 수 없지만 유용하게 쓰고 있어요. 고마워요, 리제.”
“클레어랑 같이 귀여운 북극곰 얼음틀을 쓰고 싶었거든.”
“같이 쓰는 게 하나 둘씩 늘어나네요.”
“더 늘어날 거예요.”
클레어랑 같이 살 때는 내 물건과 클레어의 구분이 흐려질지도 모르지.
미래의 일인데도 먼 일로 느껴지지는 않았다. 누군가의 손으로 멈출 수 없는 시간은 항상 흐르고 있었으니까. 포크에 만 파스타를 바라보던 클레어가 포크를 내려놓고 그리젤다의 손을 잡았다.
“리제가 생각하는 미래의 우리를, 들려줄래요?”
“지금보다 커지고 성장한 내가 클레어와 함께 있어. 클레어는 클레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나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그런 미래에요. 아직 확실한 그림은 아니지만 확실하게 만들고 싶어. 그러니까 기다려줘요. 그 말을, 클레어에게 하는 날을.”
“기다릴게요.”
내려놓았던 포크를 든 클레어가 파스타를 입에 넣었다. 파스타를 먹는 사랑스러운 연인의 모습을 바라보며 그리젤다는 생각했다. 빨리 크고 싶다는 건 어린이를 벗어나면 꿈꾸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꿈꾸고 말았다. 빨리 크고 싶다. 아니. 빨리 자신의 몫을 하는 어른이 되어서 그 미래를 확실하게 만들고 ‘그 말’을 하고 싶었다. 그 날이 오면 기다리겠다고 말해준 클레어 리우는 어떤 얼굴을 할까.
지금보다 더욱 예쁘게 웃을 거라고 생각하며 그리젤다는 파스타와 샐러드를 먹었다. 저녁을 먹고 뒷정리를 마친 두 사람은 나란히 침대에 누워 서로의 손을 잡았다. 밤에 잠긴 클레어의 아파트는 조용했다. 재생을 마친 블루레이 디스크와 냉장고에 있는 북극곰 얼음틀와 피어날 날을 기다리는 칼랑코에를 생각하던 그리젤다는 아직 자지 않는 클레어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쪽. 일부러 소리를 낸 입맞춤을 받은 클레어의 검은 눈이 그리젤다를 담았다.
“잠이 안 와요?”
“괜찮아요. 그런데 리제도 잠을 자지 못 하고 있잖아요.”
“저녁에 클레어랑 한 대화가 생각나서.”
“…같네요.”
“그 대화, 더 해볼래요?”
클레어가 고개를 끄덕였다. 긍정의 뜻이 담긴 연인의 행동을 보며 그리젤다는 예감했다. 오늘은, 미래를 그리며 늦게 자는 밤이 되리라.
*
리제클레어 800일 축하합니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리제클레어의 일상을 써보고 싶어서 시작한 연성인데 이번에도 제 취향이 듬뿍 들어가서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두 사람까지 쓰고 말았네요. 그치만 너무 재미있게 썼어요. 쏘님도 좋아해주시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업로드 하면서 두근설렘 했답니다.
800일간 저랑 리제랑 함께 해주셔서 감사하고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쏘님이랑 클레어 제가 많이 좋아해요. 사랑해요~!^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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