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선택해요, 내 사랑
*노골적이지는 않지만 간접적인 수위 묘사가 살포시 있습니다.uㅅu
겨울이 코앞으로 다가온 탓인지 해는 빨리도 모습을 숨겼다. 오늘도 빠르게 모습을 숨겨버린 해가 마지막으로 하늘에 남긴 흔적은 노을이었다. 노을이 붉게 물들인 하늘의 귀퉁이가 밤의 색으로 덧칠된다. 미술관에 걸린 유명한 화가의 그림처럼 하늘이 전부 검푸른 색으로 덧칠되면 새하얀 별들이 조용히 반짝이며 밤이 왔음을 알렸다. 해의 자리를 차지한 밤은 아직도 빛을 끄지 않은 도시를 삼켰다.
밤에 삼켜진 도시가 일기예보처럼 비에 젖어갈 것을 기대하던 그리젤다는 비가 한 방울도 떨어지지 않자 원망스러운 눈으로 야속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오늘 정도는 내려주지. 그리젤다가 사는 도시의 일기예보는 적중률이 높은 편이었지만 가끔 돈을 받아먹고 일한다는 것이 의아할 정도로 엉망인 일기예보를 할 때가 있었다. 오늘처럼. 비가 와서 돌려주려고 했다는 핑계를 대려고 가져온 우산의 손잡이를 장갑을 낀 손으로 툭툭 건드리던 그리젤다는 우산을 들고 걸어갔다.
새 구두를 신은 마피아 조직의 언더보스는 새로 포장해야 할 도로를 지나 옛날의 건물이라는 흔적이 겉에 노골적으로 묻어있는 교회에 도착했다. 죄인조차 환영하는 교회의 문을 열자 몇 번의 방문으로 익숙해진 교회의 냄새가 코를 두드렸다. 처음 이 교회에 방문한 날, 그녀가 건네준 차에서 나던 냄새였다. 피투성이로 들이닥친 그리젤다를 치료해주고 거짓말에 서투르면서도 침묵한 그녀, 클레어 리우는 오늘도 두 손을 모으고 기도하고 있었다. 그리젤다는 결혼식을 올리는 행복한 신부의 면사포를 연상시키는 새하얀 미사보를 쓰고 기도하는 클레어의 옆에 앉았다.
기도에 집중하느라 그리젤다의 발소리조차 듣지 못 했던 클레어가 고개를 들었다. 사랑하는 신과의 대화를 끝내고 세계로 돌아온 클레어의 검은 눈은 마른 꽃잎을 닮은 그리젤다의 눈을 마주 보았다. 클레어가 잔잔하게 웃으며 입술을 움직였다.
“어서 오세요, 리제.”
“잘 지냈어, 클레어? 전에 빌려간 물건을 돌려주려고 왔어요.”
“잘 지냈어요. 리제가 내게 어떤 물건을 빌려갔었죠?”
“우산. 나한테 빌려줬잖아. 이제 기억나요?”
“기억나요. 오늘은 비도 안 오는 날인데 무거웠겠어요.”
차를 타고 와서 무겁지 않았다는 말을 삼키며 그리젤다는 우산을 클레어에게 건넸다. 그리젤다가 건넨 우산을 받아든 클레어는 고마워요. 라고 인사했다. 미사보가 흔들렸다. 우산을 옆의 빈 의자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은 클레어는 자신의 행동 하나하나를 가만히 바라보는 그리젤다의 시선을 깨닫고 얼굴을 붉혔다. 우산을 건네주던 날에 클레어에게 했던 입맞춤이 그녀의 마음에 무언가를 남겼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리젤다는 웃었다.
“클레어.”
그리젤다가 이름을 부르며 벌어졌던 거리를 좁히자 클레어의 온 몸이 긴장으로 굳었다. 긴장으로 굳은 클레어를 달래듯 무릎에 곱게 모인 그녀의 손을 잡은 그리젤다는, 클레어의 손등을 장갑을 낀 손으로 천천히 쓸었다. 하지 말라는 말도, 그만 하라는 말도 하지 못 하는 클레어의 목에서 신에게 사랑했다는 사실을 맹세하는 목걸이가 달랑달랑 흔들렸다.
“긴장하지 말아요. 나는 클레어에게 나쁜 짓을 하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리제는, 마피아잖아요.”
“클레어의 말대로야. 하지만 내가 클레어한테 무기를 들이댄 적은 없잖아?”
권총도, 나이프도 없다고.
코트를 벗을 수는 없어서 한 팔만을 들어서 자신에게 무기가 없음을 증명한 그리젤다는 양 손에 끼고 온 장갑을 벗었다. 천이라는 장애물이 사라진 맨 손과 맨 손이 닿자 겨우 본래의 색을 찾았던 클레어의 얼굴은 다시 붉게 물들었다. 이대로 그녀를 끌어안고 그 날처럼 키스하고 싶은 마음이 흘러넘쳤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달랑달랑 흔들리는 저 목걸이를 스스로 벗게 하는 그 때가 그리젤다가 클레어에게 두 번째 키스를 하는 날이었다.
첫 번째 키스는 충동적이었다. 그래서인지 클레어도 키스가 끝나자마자 금방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스스로의 페이스를 되찾았다. 실수였다고 말하며 사과하는 클레어를 보며 언짢은 기분에 휩싸였던 그리젤다는 그 언짢은 기분이 자신을 밀어내는 클레어의 모습 때문임을 깨닫고 맹세했다. 신을 사랑하는 그녀에게서 신을 빼앗겠다고. 태어나는 순간부터 그리젤다가 한 번도 믿은 적이 없는 신은 클레어와 자신의 사이를 갈라놓는 가장 큰 적이었다. 클레어가 자신과 다르게 신과 평생을 함께하며 신에게 의지했다고 해도 그리젤다는 상관없었다.
신의 빈 자리를 전부 자신으로 채워주겠다는 오만한 생각으로 똘똘 뭉친 그리젤다의 손이 클레어의 손을 자신의 입술 앞으로 끌어왔다. 손등에 가볍게 입을 맞췄을 뿐인데도 클레어의 몸이 흠칫하고 떨렸다.
“리제, 이건…”
“실수 아니에요. 당신이 좋아서 하는 일이야, 클레어.”
키스하고 싶고, 당신의 몸 가득히 내 흔적을 남기고 싶어요. 무섭고 두려워?
오늘도 도망갈 생각이냐는 질문을 던질 타이밍을 재던 그리젤다는 가늘게 손을 떨면서도 자신의 손을 놓지 못 하는 클레어의 손을 발견했다. 그녀는 두려움 속에서도 자신을 놓지 못 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 마음을 받아줄 수는 없었다.
“좋아한다고 말해줘요. 아니면 나를 선택해줘. 당신의 신이 아니라 나를.”
나직한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하자 눈을 피하듯 고개를 푹 숙인 클레어가 입술을 달싹였다. 그건. 떨리는 목소리로 겨우 내뱉은 말이 그리젤다의 귀에 닿았다. 증명할 수 없는 신을 놓지 못 하는 클레어의 귀에 그리젤다는 가볍게 입을 맞췄다. 입을 맞추는 것으로 끝내지 않고 귀를 소리가 나게 빨 때마다 클레어가 이름을 불렀다.
“리제. 안, 돼요. 여기서는, 안… 아, 아… 리, 제.”
“더욱 커다란 쾌락을 알고 싶어요? 그럼, 나를 선택해.”
목걸이를 버리고 나를 사랑하면 더욱 커다란 쾌락을 줄게요, 클레어.
악마의 유혹에 흔들리는 클레어처럼 그녀의 목걸이가 흔들렸다. 달랑달랑. 귀에서 입술을 떼어낸 그리젤다는 방금 전에 선물 받은 쾌락의 여운이 녹아있는 클레어의 얼굴을 보며 생각했다. 오늘은 참, 즐거운 밤이다. 사랑하는 그녀가 갈등하고 있지 않은가. 신과 자신을 마음의 저울에 올려놓는 불경한 짓을 저지른 클레어가 자신이 돌아간 뒤에 두 눈에 고이기 시작한 눈물을 바닥에 뚝뚝 떨어뜨리며 한참을 울 것을 알면서도 그리젤다는 악마 같은 짓을 멈추지 않았다. 멈추고 싶지 않았다. 그것이,
“사랑해요, 클레어.”
태어날 때부터 죄를 안고 태어난 그리젤다가 클레어를 사랑하는 방법이었다.
*
리제클레어 2주년 축하합니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묘사가 그렇게 세지 않아서 그냥 올리긴 했지만 마지막 부분에서 양심이 이렇게 저렇게 찔리던 2주년 연성은 마퍄리제성직자클레어로 가져왔습니다. 전에 썰 푼 적이 있었지만 쓰지를 못 해가지고 아쉬워하다가 마침 2주년이 다가왔길래 조용히(!) 써봤다고 합니다. 이 글이 쏘님의 하루를 즐겁게 하는 소소한 행복이 되길 바라요.uㅅu
오늘이 지나면 12월 1일이네요. 11월 30일, 가을의 마지막 날이자 겨울을 준비하는 날이 리제클레어 성사날이라 그런지 항상 겨울이 더 기대되는 거 같아요.
2년이란 긴 시간을 함께 해주셔서 감사하고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쏘님이랑 클레어 제가 많이 좋아해요. 사랑해요.>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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