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에서도 현실에서도
01.
전생을 믿느냐고 물어보면 언제나 믿지 않는다고 대답하는 리딜 콘스탄틴은, 가족의 손에 목을 졸려서 의식을 잃어버렸던 날에 제 전생을 알았다. 똑같은 얼굴, 똑같은 이름, 똑같은 성별, 똑같은 성격으로 브레이크 없는 사람처럼 살던 전생의 리딜은 한 사람을 만나고 다른 사람처럼 변했다. 하이네 벨라크루즈. 지금도 기억한다. 언제나 혼자 살아갈 거라고 생각했던 전생의 자신이 그를 만나고 느꼈던 행복을.
의식을 회복한 리딜은 힘이 조금도 들어가지 않는 몸으로 서럽게 울었다. 똑같은 얼굴, 똑같은 이름, 똑같은 성별, 똑같은 성격인데도 자신의 옆에는 그가 없다니. 새로운 보호자가 되어준 친척은 우는 리딜을 서툴지만 열심히 달랬다. 좋은 사람 밑에서 평온하게 자랐으나 리딜은 벨라를 잊을 수 없었다. 지금의 자신이 가지지 못 하는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존재를 갈망하는 마음을 달래기 위해 리딜이 선택한 것은 친척이 직업으로 삼은 음악이었다. 매섭게 쏟아지는 소나기처럼 연주한 후에야 진정하는 일을 반복하며 성인이 된 리딜은, 전생의 자신이 벨라와 만난 나이가 되자 많아져버린 연주 횟수를 생각하다 하늘을 보았다.
올해가, 자신에게 준 마지막 기회였다.
02.
리딜은 올해 벨라를 만나지 못 하면 시간이 얼마나 걸리더라도 이 마음을 접기로 스스로와 약속했다. 어린 시절의 그 날부터 지금까지 붙잡힌 상태였으니 시간은 꽤 걸릴 테지만 어쩔 수 없었다. 리딜 콘스탄틴은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이었으니까. 살고 싶다는 생각으로 두드렸던 건반으로 세계적인 피아니스트라는 지위를 손에 넣은 청년은 콘서트에 지쳐버린 자신을 달래줄 음료를 찾기 위해 카페로 들어갔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주문한 리딜은 ‘아메리카노 나왔습니다.’라는 목소리를 듣고 카드를 꺼내다 손을 멈췄다. 카운터 너머에서 리딜이 주문한 아메리카노를 내어준 어깨를 조금 넘어서는 은색 생머리의 남자는 꿈속의 그 사람이었다. 하이네 벨라크루즈. 손님. 하고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정신을 차린 리딜은 와인색 눈을 감청색 눈으로 바라보며 웃었다.
“아, 죄송해요. 카드 여기 있어요. 그런데…”
이름이 뭐에요?
질문을 들은 벨라의 얼굴이 찡그려졌다. 리딜은 그 모습을 보며 웃었다. 마지막이라고 생각한 한 해에 당신을 만났다.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 하고 이전처럼 나를 사랑하지 않는 당신을.
그것이 얼마나 기쁜 일인지 하이네 벨라크루즈는 모를 것이다.
03.
문지방이 닳도록 드나든 덕분인지 벨라는 금방 리딜을 인지했다. 리딜이 와서 아메리카노를 주문하고 별처럼 많은 질문을 던지면 벨라는 그 많은 질문에 적당히 대답하며 리딜에게 아메리카노를 내어주었다. 선을 긋는 벨라에게 더 다가갈 방법을 모색하던 리딜은 결국 오늘, 카드와 함께 명함을 건넸다.
“피아니스트였군요.”
“맞아요. 연주도 꽤 잘 한다고요. 들으러 올래요?”
“생각해보겠습니다.”
“많이 생각해줘야 해요, 벨라.”
“당신에게 제 이름을 알려준 적이 없었던 것 같은데요.”
오랜만에 주인을 만나 꼬리를 흔드는 강아지처럼 굴다가 해버린 말실수에 벨라가 경계의 빛을 보였다. 그동안 쌓아온 탑이 무너지는 소리를 들으며 고민하던 리딜의 머릿속에 지금까지 매번 ‘믿지 않는다.’고 대답하던 그 질문이 떠올랐다. 아마, 당신도 같은 대답을 하겠지.
“전생을 믿어요?”
“그 질문이 지금의 일이랑 무슨 상관이 있는지 모르겠군요.”
“상관이 있으니까 질문하는 거예요. 그리고 관심이 있다는 이유로 당신의 신변에 위협이 가는 일은 한 적 없어요. 한 번도. 믿지 못 한다면 어쩔 수 없지만요.”
“감사하군요. 아메리카노 나왔습니다.”
“잘 마실게요. 내 말을 믿는다면 이름을 알려줘요.”
색이 깊은 와인색 눈동자가 리딜을 담았다. 믿지 않겠지. 전생이라는 것도, 신변에 위협이 간다는 것도. 오늘은 평소보다 좀 길게 피아노를 칠 것이라고 예감하는 리딜의 귀를 벨라의 목소리가 두드렸다. 하이네 벨라크루즈입니다. 믿음이라고는 없었을 텐데도 대답을 돌려주다니. 전생의 하이네 벨라크루즈 밖에 모르는 리딜 콘스탄틴이 카운터에서 멀어지며 말했다.
“기억할게요. 다음엔.”
번호도 알려줘요. 알았죠, 벨라?
당신이 궁금했다. 하이네 벨라크루즈. 꿈이나 전생이 아니라 리딜 콘스탄틴 앞에서 말하고 반응하는 하이네 벨라크루즈인 당신이.
04.
“공연 잘 봤습니다.”
“멋졌어요?”
“주문부터 하시죠.”
“그럼 카페라떼로 할래요. 우유를 마시고 싶은 기분이거든요.”
카페라떼를 내어준 벨라는 오늘도 손을 흔들며 멀어지는 리딜을 보다 말했다. 마지막으로 연주한 곡. 당신의 자작곡이라고 하던데요. 즉흥 자작곡이라고 알려졌지만 사실은 아니다. 전생의 벨라가 가끔 불러줬던 벨라의 노래였다. 벨라는 기억하지 못 하겠지만. 맞아요. 라고 긍정한 리딜은 벨라의 말을 기다렸다 카운터 사이, 짧지만 긴 침묵이 이어졌다. 이 침묵을 방해하는 손님이 없다는 사실을 리딜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리운 곡이었어요.”
그립다고 말하는 벨라를 보며 리딜은 웃었다. 좋은 곡이라서 그럴 거예요. 자신은 깨닫고 말았지만 벨라는 기억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전생을 안고 살아가는 것은 그렇게 좋은 일이 아니었으니까. 다만,
“당신의 칭찬을 들었으니 다음엔 더 힘내야겠네요. 그러니까 내일 또 만나요.”
벨라.
당신을 오래 전부터 사랑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어서 기뻤다. 앞으로도 기쁘리라고 생각하며 리딜은 웃었다.
05.
하이네 벨라크루즈는 알면 알수록 사랑스러운 사람이었다. 이제는 더 이상 전생의 자신이 부럽지 않은 리딜은 잠이 든 벨라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쓰다듬을 받은 벨라가 천천히 눈을 떴다. 내가 깨웠어요? 벨라는 고개를 저었다.
“꿈을 꿨어요. 굉장히 슬픈 꿈이었는데 기억나지 않네요.”
“슬프면 잊어야겠네요.”
“괜찮습니다.”
당신이 있으니까.
깜박이 좀 켜고 들어오라는 말을 사귀기 시작한 날부터 몇 번 했었던 것 같은데 오늘도 깜박이를 켜지 않으시다니. 투덜대는 대신 사랑스러운 벨라를 두 팔로 끌어안아서 제 품에 가둔 리딜은 젖은 벨라의 눈가에 입을 맞춘 뒤, 부드러운 목소리로 속삭였다.
“아직 슬픔을 끌어안은 것 같은데, 계속 슬프다면 나한테 집중해요.”
웃게 해줄게요, 벨라.
아까 전보다 깊은 입맞춤을 선물한 리딜은 자신의 등을 끌어안은 벨라를 보며 예감했다. 오늘 밤도 조금 긴 밤이 될 것 같다고.
*
일주일 빠르게 온 리딜벨라 500일 연성입니다! 7일 빠르지만 축하합니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_<
이번 연성은 뭐하지. 하고 고민하다가 전생을 기억하는 리딜이랑 전생을 기억하지 못 하는 벨라가 스쳐가서 그렇게.... 슥샥슥샥.
피아노 치는 리딜은 처음 적어봤는데 생각보다 나쁘진 않은게 신기했던 연성이었다... 리딜과 피아노... 벨라한테는 나중에 몇 곡 쳐주지 않을까.
아직 일주일 남았지만 일주일 전인 오늘도 고맙고 500일이란 긴 시간을 함께해줘서 고마워. 앞으로도 잘 부탁해. 쥐랑 벨라 내가 좋아해. 사랑해! 오늘도 좋은 하루 보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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