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불꽃
마왕의 성에 손님으로 찾아오는 위험한 선택을 할 정도로 절박한 상황에 처한 여성의 얼굴에서 사리엘은 긴장을 보았다. 긴장을 지울 수 없는 상황이긴 했다. 여성은 이제 막 성인이 되었으며, 자신을 사랑하고 보호해주던 부모를 잃어버렸으니까. 가만히 기다리는 사리엘의 곁으로 다가온 여성이 입술을 움직였다. 리즈벳이에요. 하늘을 닮은 눈동자만큼이나 맑은 목소리가 사리엘의 귀를 두드렸다. 사리엘은 사리엘입니다. 라고 대답하며 리즈벳의 손을 잡았다. 리즈벳의 손은 차가워서 겨울을 떠올리게 한다는 사리엘보다 차가웠다. 인간의 손이 인간을 버린 마족보다 차갑다니. 긴장한 탓일까.
“얼마 전에 보낸 편지는 도착했나요?”
“당신도 알겠지만 그 편지는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직접 오셨겠지요?”
“무엇이든 알고 있네요. 마왕이기 때문인가요?”
“설마요. 하지만 당신이 그 편지를 보낸 이유는 압니다. 나라 때문이지요, 여왕?”
“맞아요, 마왕. 나는 당신의 대답을 듣기 위해 왔어요.”
리즈벳의 말을 들은 사리엘은 차가운 손과 달리 리즈벳의 눈이 포기라는 단어를 모르는 사람처럼 타오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리즈벳의 눈에는 하늘이 아니라 푸른 불꽃이 담겨있었던 모양이다. 그 불꽃이 무엇을 태울지 궁금해진 사리엘이 자신의 대답을 기다리는 리즈벳을 보았다.
“당신의 제안을 받아들이죠.”
“그럼…”
“네, 이제 당신의 계약자는 접니다.”
사랑스러운 리지.
사랑이라고는 조금도 담기지 않은 사리엘의 목소리가 리즈벳의 애칭을 불렀다. 리즈벳은 도망치지 않고 애칭을 부른 사리엘의 다음 행동 또한 받아들였다. 리즈벳의 손등에 사리엘의 손등이 닿았다. 입술을 떼어내며 사리엘은 주문을 읊었다. 그 직후, 리즈벳의 등에 새겨지기 시작한 문신이 두 사람이 계약을 마쳤다는 증거였다.
마왕의 손을 잡아서까지 자신의 나라를 지켜야 했던 여왕, 리즈벳의 방은 리즈벳의 방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그녀의 계약자인 사리엘의 방이기도 했다. 침대와 책장. 위험한 일이 일어나면 도망칠 수 있는 탈출구가 숨겨진 비밀의 문이 이 방의 전부였다. 사리엘은 왕관의 무게를 견디는 여왕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차가운 손길을 느낀 리즈벳이 천천히 눈을 떴다. 지금도 푸른 불꽃을 닮은 눈이 사리엘을 담았다.
“좋은 아침, 시엘.”
“새벽이야.”
“알아. 넌 저녁에 날 건드리지 않잖아. 별 일은 없었어?”
“그래. 오늘은 참 평화로웠지.”
“이런 평화, 내일은 사라지겠지.”
“아쉬운가?”
“아쉽지 않아.”
내가 해야 하는 일이고 당신을 만나러 가겠다고 맹세한 날부터 각오했으니까.
국왕 부부의 외동딸로 태어난 리즈벳에게 다른 길은 없었다. 어렸을 때부터 왕이 되기 위해 교육을 받고 자라온 공주였으나 그녀에게는 나라를 구할 힘이 없었다. 결국, 리즈벳은 죽음을 각오하고 사리엘을 만나 그의 계약자가 되었다. 여왕으로 즉위한 그 날, 리즈벳은 자신의 방에서 소리없이 울었다. 사리엘은 우는 리즈벳에게 손을 뻗으려고 했으나 리즈벳은 거절했다. 괜찮아. 나라를 위해 자신을 태우려고 결심한 푸른 불꽃의 곁에 마왕은 계약자인 그녀의 생이 끝날 때까지 머물기로 했다.
“새벽에 일어났으니 오늘은 평소보다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겠네.”
“쉬엄쉬엄 하라고 네 시녀가 울던데.”
“인간의 생은 당신이랑 다르게 짧아.”
“그럼.”
내 생을 나눠가지겠어?
갑작스러운 제안에 리즈벳의 얼굴이 굳었다. 진지한 제안임을 알아차린 리즈벳은 모든 일이 끝나면, 생각해볼게. 라고 대답한 뒤, 침대에서 일어났다. 사리엘이 계약자 그 이상의 관계를 바란다는 사실은 리즈벳도 알고 있으리라. 리즈벳은 둔하지 않았다. 침대에서 내려온 여왕의 몸을 사리엘이 품에 안았다. 차마 소리를 치지 못 하는 리즈벳의 목에 사리엘은 입술을 묻었다.
계약자로 묶인 시간이 5년이었다. 계약자로서의 관계만을 유지하던 사리엘과 리즈벳은 부모님을 잃었던 날의 악몽이 리즈벳을 괴롭혔던 어두운 밤, 몸을 섞었다. 마왕은 자신이 저지른 이 충동적인 일의 기반에 ‘사랑’이라는 감정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자 그녀의 일상이 되기로 마음먹었다. 사랑한다는 말은 하지 않았지만 언제나 곁에 있었고, 그녀가 원하는 일은 무엇이든 했다. 가끔 리즈벳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할 때는 말하고 싶었다.
사랑해. 라고. 하지만 사리엘은 알고 있었다. 이 말은, 리즈벳이 가장 바라지 않는 말이었다.
“시엘.”
“조금만 더 이대로 있어.
“나는 여왕이야. 약해져서는 안 돼.”
“그래서 같은 마음인데도 너는 나의 그 말을 바라지 않지. 그 마음을 아니까 나는 네가 바라지 않는 말을 하지 않을 거야.”
“…저주 같잖아.”
“나의 계약자.”
나의 리지. 네가 건 저주라면 나는 얼마든지 받아들일 거야. 그러니 타올라. 나의 마음조차 연료로 삼아서.
목에 닿았던 입술이 뺨에 닿았다. 몸을 섞을 때와는 다르게 입술에는 닿지 않는 사리엘의 입술이 닿았던 뺨을 매만지던 리즈벳은 몸을 돌려 사리엘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영혼을 묶는 계약을 하면 다음 생에는 네게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겠지?”
“맞아. 똑똑한 여왕님이네.”
“그럼, 지금 새로운 계약을 하자.”
말을 마치고 눈을 감은 리즈벳을 보던 사리엘은 리즈벳의 곁으로 다가가 그녀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쌌다. 입술과 입술이 닿았다. 서로의 영혼을 하나로 묶기 위한 깊은 입맞춤이었다.
*
시엘리지 2600일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축하합니다!
시간이 흘러흘러 2600일이네요. 오늘 뭘 쓸지 고민하다가 마왕시엘x여왕리지가 너무 보고 싶어가지고 그만.... 욕망에 푹 잠겨버렸답니다.
이번 생에 이뤄지지 않아도 다음 생을 기약하는 제 취향을 넣어봤는데 크림님 취향에도 맞으시면 좋겠어요!^ㅁ^
2600일이란 긴 시간을 저랑 시엘이랑 함께 해주셔서 감사하고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크림님이랑 리지 제가 많이 좋아해요. 사랑해요. 오늘 하루도 즐겁게 보내시고 건강하세요!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