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성

歲季

<span class="sv_member">에메트</span>
에메트 @acidcatsle
2026-02-07 17:45

01.

 

봄과 여름과 가을을 지나 겨울이 다가오면 나라는 폭풍전야처럼 고요해진다봄을 가져올 제물로 선택한 사람을 찾기 위한 고요였다제물을 바치지 않고 끝없는 겨울에서 살아가는 방법도 있었지만 이 나라의 사람들을 그렇게 하지 않았다아무 연고도 없는 사람 하나가 제물로 당연히 바쳐졌다이번 제물로 선택된 그리젤다 페러그린은 끝이라고 생각했던 자신의 앞에 나타난 검은 머리카락의 여인을 마른 꽃을 닮은 눈에 담았다.

 

여인은 말이 없었다. 혹시 다른 나라 사람이에요난 다른 나라 말은 전혀 모르는데 큰일이네. 목숨을 잃을 뻔한 제물이라는 사실이 거짓말처럼 여겨질 만큼 뻔뻔하게 행동하는 그리젤다의 귀를 낯선 목소리가 두드렸다.

 

죄송해요곧 돌아가게 해드릴게요.”

 

눈앞에 있는 여인의 목소리였다그리젤다는 자신을 곧 돌아가게 해주겠다고 말한 여인의 곁으로 다가가 아직 자신을 바라보지 않는 여인과 눈을 마주쳤다밤을 닮은 검은 눈에 그리젤다가 담겼다.

 

나한테 미안하다면 이름을 말해줘요그쪽의 이름.”

 

난 그게 너무 궁금하거든.

웃으며 묻자 당황한 여인이 입술을 달싹였다오늘 안에는 그녀의 이름을 듣지 못 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스쳤지만 그리젤다는 상관없었다기다림은 그리젤다가 가장 잘 하는 일이었으므로.

 

 

02.

 

그리젤다와 함께 지내게 된 여인―클레어 리우는 겨울의 신을 모시는 사제라고 했다언제부턴가 들리는 겨울의 신의 목소리를 따라 몇 년 전이 성에 오게 된 클레어는 성에 오는 자들을 매번 신이 가르쳐준 방법으로 돌려보내며 기도했다고 한다모두가 제물을 바쳐 봄을 불렀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사제의 기도가 봄을 부르고 있었던 것이다옛날처럼그리젤다는 홀로 힘낸 클레어를 도와서 만든 저녁을 먹던 스푼을 내려놓고 클레어를 보았다.

 

외로웠겠네요.”

괜찮았어요제가 할 일이니까요.”

혼자 있었는데 어떻게 괜찮아?”

정말로―

 

무언가 더 말하려던 클레어의 눈에 맺히기 시작한 눈물을 본 그리젤다는 클레어의 곁으로 다가가 그녀의 옆에 앉았다신님은 보시겠지만 다른 사람은 못 보게 해줄게요울린 사람이 자신이기 때문에 해주는 일은 아니었다클레어라서 해주고 싶었다솔직한 마음을 인정한 그리젤다는 자신을 방패로 삼고 울기 시작한 클레어를 내려다보다 용기를 내서 그녀의 등을 토닥였다서툰 토닥임이었다.

 

 

03.

 

리제.”

 

자신이 가르쳐준 애칭을 이제야 자연스럽게 부르게 된 클레어의 목소리가 그리젤다의 귀를 두드렸다그녀는 울음을 터뜨린 그 날봄을 부르는 기도가 끝나면 꼭 자신을 보내주겠다고 했으나 그리젤다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난 여기 있고 싶어요.

 

다른 사람들은 사랑하는 사람이나 돌아갈 곳이 있는 상황에서 제물로 바쳐졌겠지만 그리젤다에게는 사랑하는 사람도돌아갈 곳도 없었다클레어는 그리젤다의 머리를 서툴게 쓰다듬으며 나중에 다시 물어볼게요그때의 리제는 분명 다른 대답을 할 거예요라고 말했지만 그리젤다는 알고 있었다클레어의 손은 자신의 곁에 온 누군가가 떠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떨리고 있다는 것을.

 

게으름 부리려고요.”

너무 게으름을 부리면 신님이 혼을 내요.”

그럼 신님한테 혼나지 않게 클레어가 도와줘야겠네.”

 

손을 잡자 클레어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겨우 용기를 낸 클레어가 입술을 달싹였다일어나요라는 이 목소리가 그리젤다의 백지 같은 인생을 바꾸고 있는 무엇보다 강력한 주문이었다이 사제님은 그 사실을 언제 알게 될까그리젤다는 그 강력한 주문을 거부할 수 없는 몸을 일으킨 뒤클레어를 따라갔다.

두 사람은 서로의 손을 오랫동안 잡았던 손을 기도의 준비를 하면서 겨우 놓았다.

 

 

04.

 

봄을 부르는 기도가 끝났다제물이 더 이상 여기 있을 이유는 없다는 사실을 안 클레어가 리제하고 그리젤다를 불렀다그리젤다는 입술을 움직이지 못 하는 클레어의 손을 잡았다그녀에게 왔던 사람들은 언제나 그녀와의 이별을 선택했을 것이다사랑하는 사람에게 가거나 자신이 돌아갈 곳으로 가기 위해서.

 

괜찮아요말해봐.”

제물은 이제 필요하지 않아요그러니까…

난 클레어가 필요해요내가 사랑하는 사람도 클레어고돌아갈 곳도 여기가 되어버렸으니까.”

 

분명하게 말하는 그리젤다를 보는 클레어의 눈에 또 다시 눈물이 맺혀가기 시작했다정말이라고 중얼거리며 그리젤다는 클레어의 눈가에 입을 맞췄다지팡이를 놓은 클레어가 두 팔로 그리젤다를 끌어안았다.

 

…입 맞춰줄래요?”

 

작은 목소리로 건넨 마음에는 지금까지 클레어가 숨기려던 진심이 담겨있었다그리젤다는 그 진심에 말이 아닌 행동으로 응했다맞닿은 입술과 입술을 통해 서로를 느끼며 두 사람은 깨달았다설령 신이 자신들의 사랑을 부정한다고 해도 이제 자신들은,

 

절대 떨어질 수 없을 정도로 서로를 품어버리고 말았다는 사실을.



*
리제클레어 3주년 축하합니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어느새 3주년이네요! 오피셜로 가져올까 에유로 가져올까 하다가 에유로 가보았습니다. 클레어에게 클레어가 필요하다고 말하는 리제가 많이 쓰고 싶었나 봐요.uㅅu
11월의 마지막 날 잘 보내시고 3년이란 긴 시간, 함께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려요. 쏘님이랑 클레어 제가 많이 좋아해요. 사랑해요~!
건강하고 행복한 하루하루 보내시길 바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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