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많은 시간을 넘어
01.
가장 훌륭한 춤을 춘 사람은 리즈벳이었지만 많은 박수를 치고도 사람들이 선택한 주인공은 리즈벳이 아니었다. 2등조차 되지 못 하고 무대에서 입었던 옷을 갈아입고 평소보다 빠른 걸음으로 빠져나가려는 리즈벳을 잠깐. 이라는 낯선 목소리가 붙잡았다. 고개를 돌린 리즈벳의 눈에 검은 머리카락의 남자가 보였다. 볼 일이라도 있으신가요? 물어보자 어딘지 눈을 닮은 남자가 리즈벳의 앞으로 다가왔다.
“무대에 다시 도전할 생각인가?”
“도전해야죠. 오늘처럼 불합리한 무대라도 춤을 사랑하는 마음은 진짜거든요. 하지만 다음에 도전할 때는…”
후원이라는 준비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입에 올리지 못 하는 리즈벳을 보던 남자가 명함을 내밀었다. 생각이 있다면 찾아와. 리즈벳은 하늘색 눈으로 남자의 녹색 눈을 바라보다가 내밀어진 새하얀 명함을 받았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체온에 잠시 놀라긴 했지만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 멀어지는 리즈벳의 모습을 지켜보던 남자, 사리엘은 리즈벳과 닿은 손을 바라보다 중얼거렸다.
“여전히 따뜻하구나, 리지.”
02.
염화(炎火) 능력을 사용하지만 불과는 거리가 멀다는 소리를 자주 들었던 뱀파이어, 사리엘의 인생은 리즈벳의 전생인 엘리자베트 폰 로텐부르크를 만나면서 바뀌었다. 엘리자베트를 흡혈해서 뱀파이어로 만들었다면 행복이라는 결말로 도달할 수도 있었겠지만 사리엘은 엘리자베트가 죽는 그 날까지 엘리자베트를 흡혈하지 못 했다. 피를 마시며 달이 있는 밤에만 움직이는 생활로 그녀를 속박할 수 없었으니까.
인간이었던 엘리자베트는 죽으면 다음이 없는 사리엘과 다르게 새로운 모습으로 태어났다. 사리엘은 새로운 모습으로 태어난 엘리자베트를 이전처럼 사랑하거나,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과 사랑에 빠지는 그녀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깨달았다. 어떤 모습, 어떤 삶을 살아도 자신이 리지라는 존재 그 자체를 사랑하게 되리라는 사실을.
인간은 이해할 수 없을지도 모를 사랑을 반복하며 밤을 걸어가는 사리엘의 앞에 나타난 이번 환생이 리즈벳이었다. 플래티나 블론드와 하늘색 눈동자를 가진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발레리나. 사리엘은 이번에도 리즈벳을 사랑하게 되었지만 그녀가 같은 마음이 아니라면 이전처럼 리즈벳의 선택에 따를 생각이었다.
사리엘의 마음을 모르는 리즈벳의 연락은 일주일 뒤에 왔다. 시간을 내주실 수 있나요? 부드러웠지만 절박함이 담긴 목소리가 사리엘의 귀를 두드렸다. 리즈벳이 어느 때보다 간절히 자신의 도움을 바라고 있음을 깨달은 사리엘은 시간과 장소를 정하고 약속 장소인 카페에서 리즈벳을 기다렸다. 멈추지 않는 시간이 흘러 약속 시간이 되었다. 하지만 나타나야 할 리즈벳의 모습은 20분이 지나도 보이지 않았다. 불안감을 느낀 사리엘은 카페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인간보다 뛰어난 자신의 후각에 감지된 피냄새를 맡고 골목으로 뛰어들었다.
피냄새의 주인은 리즈벳이었다. 골목에 누운 리즈벳에게 빠르게 뛰어가 리즈벳을 안아든 사리엘은 리즈벳의 이름을 부르려다 리즈벳이 아직 살아있음을 깨달았다. 병원에 데려가면 늦으리라. 하지만.
결심을 마친 사리엘의 눈이 태양을 녹인 금빛으로 물들었다. 그는 죽음을 향해 걸어가고 있는 리즈벳의 귀에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미안해, 리지.”
나는 이제부터 네게서 태양을 빼앗을 거야.
03.
태양을 빼앗기고 피를 마셔야 한다는 사실에 리즈벳은 적응하지 못 했다. 리즈벳을 더욱 절망으로 몰아넣은 것은 인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현실이었다. 정말로 그 방법 밖에 없었던 거야? 리즈벳의 날카로운 물음에 사리엘은 대답하지 않았다. 오늘도 자신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는 사리엘을 본 리즈벳이 사리엘의 팔을 잡았다. 거칠어진 호흡을 고른 리즈벳이 사리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없었다고 말해줘. 뱀파이어가 된 순간부터 나를 괴롭히는 이상한 꿈보다 원망을 받으려는 것처럼 침묵하는 당신을 보는 일이 더 괴로우니까.”
“나를 원망하는 쪽이 더 쉽지 않나. 내가 너를 물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으니까.”
“사리엘.”
“변하지 않아, 리즈벳.”
내가 네게서 태양을 빼앗은 것도, 내가 널 피를 마시는 괴물로 만들었다는 것도.
덤덤하게 말한 사리엘은 리즈벳의 몸을 안아든 뒤, 리즈벳을 의자에 앉혔다. 그리고 헝클어진 리즈벳의 머리를 익숙하게 빗었다.
“어제 꿈에서, 봤어.”
“꿈이야.”
“엘리자베트. 카구야. 린. 제시. 모니카. 스텔라. 내 이상한 꿈에 등장하는 여자들의 이름이야. 가장 많이 나온 사람은 엘리자베트였지. 그리고 그녀들의 곁에는 늘 당신이 있었어, 사리엘.”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은 반드시 듣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리즈벳의 얼굴에 녹아있었다. 그녀들을 사랑했고 그녀들에 이어 나타난 너까지 사랑했다는 말을 내뱉을 수 없는 사리엘의 빗을 잡은 손을 리즈벳의 손이 잡았다. 처음 만난 날처럼 따뜻하지 않은 손이었으나 사리엘은 그녀의 손을 그 어떤 손보다 사랑하고 있었다. 키스하고 싶은 충동을 힘겹게 견디는 사리엘의 손에 든 빗을 빼앗고 의자에서 일어나 사리엘의 얼굴을 감싸 자신의 앞으로 끌어온 리즈벳이 입술을 움직였다.
“말해줘.”
또 다시 침묵을 선택한 사리엘은 리즈벳의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맞댔다. 복잡한 감정이 뒤섞인 사리엘의 눈을 바라보던 리즈벳이 사리엘의 얼굴을 감싼 손을 놓았다. 나가줘. 기다렸다는 말을 들은 것처럼 자연스럽게 밖으로 나가던 사리엘이 문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난 네게서 꿈도 빼앗은 사람이야. 원망해도 돼, 리즈벳.”
리즈벳은 대답하지 않았다. 사리엘은 리즈벳을 끌어안고 그녀를 달래주고 싶을 충동을 참으며 리즈벳의 방을 나갔다.
04.
“나를 오랫동안 기다렸구나.”
꿈으로 리즈벳이 알아낸 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사리엘은 자신이 그녀의 말을 긍정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알았다. 리즈벳을 사랑했지만 사리엘은 리즈벳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은 사람이었다. 그런 자신이 사랑받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기다렸다는 말로 포장하지 마. 나는 미련을 버리지 못한 어리석은 괴물일 뿐이야.”
“괴물이 아니라 자신을 상처 입히고 싶은 사람이겠지.”
“밤의 삶에 익숙해진 덕인지 여유로워졌군. 축하해. 곧 네 삶을 망친 장본인에게서 독립할 수…”
“독립할 생각 없어. 당신은 아무 것도 알려주지 않았잖아.”
진실을 들을 때까지 당신 옆에 있을 거야, 시엘.
리즈벳이 입으로 말했던 수많은 리지들이 불렀던 그 애칭이 리즈벳의 입에서 나왔다. 너는 리즈벳이야. 사리엘의 말을 들은 리즈벳은 얼마 전처럼 사리엘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서 자신의 앞으로 데려왔다.
“알려줄 때까지 당신의 곁에 있을 거야.”
시엘.
사리엘이 세운 벽을 부수려는 것처럼 또 다시 애칭을 부른 리즈벳의 입술이 사리엘의 입술과 닿았다. 결국 리즈벳이 원하는 대로 자신의 욕망을 드러낸 사리엘이 금빛으로 물든 눈으로 리즈벳을 보다가 리즈벳의 목에 얼굴을 묻었다.
“후회할 거야.”
“당신의 말이 틀렸다는 사실을 내가 증명하고 당신에게서 진실을 들을 거야. 그러니까 항복해.”
자신에게 백기를 들기를 요구하는 리즈벳의 뺨에 깊게 키스하며 사리엘이 속삭였다.
“항복을 요구할 필요는 없어. 너는 언제나 나에게서 승리하니까. 네 승리야, 리지.”
*
시엘리지 8주년 감사합니다~ 축하합니다~ 사랑합니다~!
그렇습니다. 시엘리지 8주년입니다. 연성을 놓칠 수 없었기에 호다다닥 달려봤어요.^3^
결국에는 리지를 이길 수 없는 시엘을 쓰고 싶었습니다. 발렌타인이고 리지 생일이라는 것을 떠나서 시엘은 영원히 리지에게 이길 수 없을 거에요. 심장에게 이길 수 있는 뱀파이어가 어디 있겠어요.
8주년이라는 긴 시간을 함께 해주셔서 감사하고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크림님이랑 리지 제가 많이 좋아하고 사랑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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