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성

그 별의 이름은 당신의 이름

<span class="sv_member">에메트</span>
에메트 @acidcatsle
2026-02-07 18:46

세계의 멸망은 여러 매체에서 묘사한 것처럼 요란하게 찾아오지 않았다소리도 없이 찾아와 지구라는 별을 잠식한 멸망으로 많은 것이 무너지고 망가졌다멸망을 받아들인 다른 생물들과 다르게 생을 이어가야하는 욕망을 버리지 못한 인간은경계를 세워 무너지지 않는 도시를 만들었다경계 안에서 살아가는 자들도경계 밖에서 살아가는 자들도 그 도시를 완벽한 도시라고 불렀다.

완벽의 가치는 바닥으로 떨어진지 오래인데도.

 

리딜 콘스탄틴은 경계 밖에서 살아가는 자였으나 이 무너지고 망가진 장소를 무덤으로 삼을 생각은 없었다경계 밖에서 살아가는 대부분의 인간들처럼 경계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목표로 삼은 그의 인생은 지금은 대부분이 폐허가 된 놀이공원이라는 장소의 롤러코스터를 닮아있었다빠른 속도로 추락하거나빠른 속도로 상승하거나.

오늘은 빠른 속도로 추락하다가 아슬아슬하게 멈춘 날이었다좀비가 되어버린 사람에게 물릴 위기를 간신히 넘긴 리딜은 좀비의 시체가 움직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두 눈으로 몇 번이나 확인한 후에야 한숨을 쉬었다.

 

죽는 줄 알았네.”

 

죽는 것은 곤란하다더욱이 오늘은 카페 트라움에 방문하기로 한 날이었다이 무너지고 망가진 장소에서 세계가 경계 밖과 경계 안으로 나눠지기 전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유일한 장소가 바로 카페 트라움이었다처음에는 많은 고난이 있었던 모양이지만 카페의 주인인 하이네 벨라크루즈의 노력으로 카페 트라움은 리딜을 포함한 많은 사람의 휴식 장소가 되었다비록 옥상에 위치하긴 해도 대화했던 사람이 갑자기 좀비로 변해 공격하는 장소가 경계 밖이었다.

 

리딜은 늘 가지고 다니는 가방에 있는 새로운 신발을 신은 뒤걸음을 옮겼다죽은 좀비를 묻어줄 여유는 없다여유를 쓸 곳은 이전보다 더욱 한정된 망가지고 무너진 세계에도 여전히 눈부신 태양이 리딜을 비췄다.

 

*

 

엘리베이터와 에스컬레이터를 타던 과거에 대한 그리움이 차오르는 순간에 카페 트라움이 보이지 않았다면 리딜은 이 카페에 오는 것을 포기했을지도 모른다벨라가 없었다면 첫 방문 이후로 이 카페를 잊어버리고 롤러코스터 같은 삶만을 이어갔을 것이고그런 의미에서 벨라는 리딜을 삶에 붙잡아주는 브레이크 같은 사람이었다비록―

 

벨은 경계 안으로 가고 싶지 않아요?”

가고 싶지 않습니다.”

 

카페에 올 때마다 가벼운 목소리로 던져보는 제안은 오늘도 거절당했지만거절당해도 왜요라고 한 번은 더 물어보는 리딜이 순순히 물러나자 벨라는 저번처럼 아메리카노죠라고 물었다고개를 끄덕이며 맞아요라고 대답하며 가격을 지불한 리딜은 자신의 이상을 깨닫고 주문으로 주제를 돌린 벨라를 보았다역시 벨라는 망가지고 무너진 이곳과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다그래서 눈에 밟히기 시작한 벨라에게 리딜은 열심히 말을 걸었다.

 

소지하고 있는 돈이 소문으로 들던 경계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돈에 가까워지기 시작한 때부터는 경계 밖을 벗어나자는 제안도 던졌으나 벨라의 대답은 변한 적이 없었다오늘이 네 번째멘탈이라도 평소처럼 멀쩡했다면 이유까지 물어봤을 리딜에게 주문하신 아메리카노 나왔습니다라는 벨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잘 마실게요.”

 

얼마나 남았을지 모를 종이컵에 담긴 얼마나 남았을지 모를 원두로 만들어진 아메리카노의 맛은 오늘도 변함이 없다카페에 음악이 흘렀다면 딱 좋았겠지만 커다란 소리는 주변의 좀비를 끌어 모은다.

 

오늘도 맛있네요.”

어제도 온 것처럼 말하는군요.”

치료제가 개발되고 옛날로 돌아가면 매일매일 올 생각이거든요.”

 

개발된 치료제가 경계 밖까지 치료제가 배포되는 날은 금방 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행복회로를 돌리는 긍정적인 사람처럼 만든 말에 벨라가 웃었다그때는 가격을 올릴 겁니다리딜은 가격을 올린다고 말하는 벨라를 바라보다가 웃으며 말했다.

 

돈 열심히 벌어두고 있으니 걱정 말고 올려요.”

 

*

 

경계 안의 사람들이 경계 밖을 버리고 치료제를 독점하고 있다는 소식은 경계 안의 도시를 희망이라고 생각하던 많은 사람을 절망시켰다방금 전까지 멀쩡히 움직이고 대화하다가 좀비에게 물려 감염된 사람들을 죽이고오늘도 어떻게든 살아남게 된 리딜은 가방 속의 돈을 확인한 뒤피에 젖은 신발을 닦았다새로운 신발을 사고 싶었지만 오늘 같은 일이 벌어지면 만물상은 새로운 장소로 이동했다이동하다가 죽은 만물상이 여럿이었다좀비가 된 만물상도 여럿이었고리딜은 이런 세계에서도 여전히 예전처럼 사는 유일한 사람을 생각했다.

당신은오늘도 무사할까그 의문이 리딜의 목적지를 결정했다.

다행히 건물 옥상에 위치한 카페 트라움에는 아무런 피해가 없었다이 카페와 벨라에게 피해가 있었다면 지금보다 더 복잡한 기분이 되었을 리딜이 카운터로 다가갔다벨라의 눈이 리딜을 담았다.

 

주문 전에 마지막으로 물어볼게요여기서 나가기 싫은 이유가 뭐에요?”

 

오늘은 꼭 말해줘요라는 리딜의 목소리가 평소와 달랐던 탓일까벨라는 평소라면 능숙하게 넘겼을 질문을 넘기지 못 하고 침묵하다 입술을 열었다.

 

당신에게 있는 위험을 감수할 수 있는 용기가 내겐 없으니까요.”

 

예전을 버린 많은 사람들 틈에서 여전히 예전을 버리지 않고 살아가는 유일한 사람이 용기가 없다니그 말을 부정하고 싶은 마음을 누른 리딜은 주문은 다음에 할게요라고 말하고 카페 트라움을 나왔다이곳도 언젠가는 닫히고 그때는 벨라와 정말로 이별이겠지이 망가지고 무너진 장소는 결국 자신과 벨라의 무덤이 되겠지만 아직은 이별을 말하고 싶지 않았다지금 자신이 품은 이 마음을 확실히 전할 수 있는 특별한 선물을 찾기 위해 움직이기로 한 리딜의 발이 조금빨라졌다.

 

*

 

주문을 다음으로 미룬 뒤카페 트라움에 모습을 보이지 않다가 일주일이 지난 후에야 벨라를 찾아온 리딜은 마감 준비를 하는 벨라에게 손을 흔들며 여우처럼 웃었다.

 

잘 지냈어요?”

영업 끝났습니다마감 준비를 도울 거라면 들어오고 돕지 않을 거라면 내일 오세요.”

그럼 당연히 들어가서 도와야죠.”

 

벨라가 건네주는 앞치마를 입은 리딜은 원래부터 일했던 카페 종업원처럼 벨라를 도와 청소를 끝냈다앞치마를 벗은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았다먼저 말을 꺼낸 사람은 가방 속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낸 리딜이었다.

 

실은 조금 더 빠르게 오고 싶었는데요제대로 등록됐는지 확인하느라고 늦었어요.”

등록이요?”

벨의 이름으로 별을 샀어요하이네 벨라크루즈경계 안의 사람들이 알아도 바꿀 수는 없어요등록이 끝났거든요.”

 

벨라의 이름이 붙은 별의 위치를 알려주며 웃은 리딜은 자신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리딜하고 자신을 부른 벨라의 뺨에 입을 맞췄다.

 

벨의 이름이 붙은 별이 존재하면 한 번 더 살고 싶어질 것 같아서요지금도 당신은 나를 한 번 더 살게 하는 사람이지만요.”

 

좋아해요나랑 같이 살아줄래요?

고백을 받은 벨라는 리딜이 내민 종이와 리딜을 바라보다가 종이를 받고 웃었다지금까지 리딜이 본 웃음 중에 가장 환한 웃음이었지만 리딜은 얌전히 벨라가 할 답과 행동을 기다렸다기다릴 수 있었다벨라라면 모든 욕망을 누른 채로 언제까지라도.

 

그래요.”

 

긍정의 대답을 듣자마자 웃으며 자신을 끌어안은 리딜의 품에 가만히 안겨있던 벨라가 입술을 움직였다.

 

우리 나중에그 별에 갈까요?”

 

경계 밖에 사는 사람들의 미래는 죽음이었다질문을 들은 리딜도 알았고 질문을 한 벨라도 알았다하지만,

 

그래요그 별에 가서 하고 싶은 일들을 많이 생각해봐요전부 다 할 때까지 돌아오지 않을 거니까.”

 

망가지고 무너진 무덤에서 함께 살아가기로 한 연인은 이뤄지지 않을 미래를 약속한 뒤벨라의 이름을 가진 별이 반짝이는 하늘 아래에서 입을 맞췄다살아있는 서로의 존재를 맞닿은 온기를 통해 확인하듯이.

 

 

*

리딜벨라 3주년 축하합니다감사합니다사랑합니다~!
전부터 꼭 쓰고 싶다고 생각했던 좀아포 리딜벨라그때 쥐랑 썰로 풀었던 이야기도 샥샥 집어넣어보았음재미있게 읽었으면 좋겠다.^~^!
3년이란 긴 시간 함께 해줘서 고맙고 앞으로도 잘 부탁해쥐랑 벨라 내가 많이 좋아해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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