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성

기다림이 끝나고

<span class="sv_member">에메트</span>
에메트 @acidcatsle
2026-02-07 18:42
열린 보석함에 장치된 오르골의 음악 소리가 사리엘의 잠을 깨웠다. 두 번째 결계를 깨뜨린 누군가가 복도에 도착했음을 알리는 음악 소리는 사리엘의 손이 보석함을 닫자 사라졌다. 조용해진 방의 불을 켜고 풀려있던 머리를 묶은 사리엘의 녹색 눈이 굳게 닫힌 문을 보았다.
이전에도 두 번째 결계를 깨뜨리고 복도까지 도달한 사람은 있었지만 복도의 미로를 벗어나 이 문을 연 적은 없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이 미로를 만든 사람은 세계를 구한 영웅, 엘리자베트 폰 로텐부르크였으니까.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는 영웅이 된 엘리자베트가 많은 구애를 뿌리치고 연인으로 원한 사람은 사리엘이었다. 오래 전부터 사랑한 그녀가 내민 손을 잡았을 때, 사리엘은 엘리자베트를 행복하게 해주겠다고 결심했으나 그때의 사리엘은 몰랐다. 영웅을 사랑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두 사람의 행복을 축하할 수 없었던 사람들이 질시 끝에 준 최후의 선물은 저주였다. 다행히 그 저주에 걸린 사람은 엘리자베트가 아닌 사리엘이었다. 엘리자베트가 저주에 걸리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하던 사리엘은, 해주할 수 없는 저주가 자신의 몸을 잠식하기 전에 엘리자베트의 곁을 떠나려고 했으나 엘리자베트는 그런 사리엘을 붙잡았다. 사리엘에게 손을 내밀었던 그 날처럼.
예정된 파국과 절망을 함께 견디는 것보다 자신이 떠나는 것이 이성적으로 옳다는 사실을 알고 준비했던 많은 말이 시엘. 이라는 울음기 섞인 목소리에 사라졌다. 너를 포기하지 못 하는 내가 나빠. 나쁜 거야. 라고 속삭이며 사리엘은 엘리자베트를 끌어안았다.
 
수많은 실패를 거듭하며 닳아갔으나 포기하지 않았던 엘리자베트도 죽음만은 피할 수 없었다. 코 앞으로 다가온 죽음을 피할 방법이 없음을 깨달은 엘리자베트는 마지막 희망을 환생할 자신에게 걸기로 하고 많은 준비를 했다. 사리엘의 저주를 누르는 동시에 그를 가두게 될 이 방과 결계. 그리고 실패를 거듭하며 사리엘과 자신을 연결한 인연의 실이 그녀의 준비물이었다.

-당신을 기다리게 만들어서 미안해, 시엘.

엘리자베트가 사랑을 담은 눈으로 아름답게 웃었다. 그 눈과 웃음을 보고 네가 이런 짐을 환생한 후에도 짊어질 이유가 없다는 말을 내뱉을 수 없었던 사리엘은, 말을 삼킨 입술을 사랑스러운 연인의 손으로 가져갔다. 입술을 떼어낸 사리엘이 말했다.

-기다릴게, 리지.

모든 희망을 사리엘과 자신을 연결한 인연의 실과 환생한 자신에게 맡긴 엘리자베트는 사리엘의 말이 끝나자마자 깨어나지 않는 잠으로 빠져들었다. 사리엘은 신의 축복을 받아 흙으로 돌아가지 않고 빛이 되어 사라지는 연인의 뺨을 쓰다듬었다. 손에 남은 엘리자베트의 온기가 사라지기 전, 사리엘은 자신을 이 방에 오래도록 가둘 단단한 문과 자신의 손가락에 걸린 인연의 실을 보았다.

끝을 알 수 없는 긴 기다림이 시작되었다.


*


사리엘이 자신의 긴 기다림이 끝나기를 바라지 않게 된 것은 창문을 통해 보던 계절의 반복을 더 이상 세지 않게 되었을 때였다. 그때부터 사리엘은 잠을 잤다. 자신이 품은 희망과 기대를 죽이기 위해.
긴 시간을 기다렸지만 저주에 걸린 자신이 새로운 이름으로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엘리자베트의 환생을 전생의 사랑을 이유로 구속할 수는 없었다. 문을 보지 않기 위해서 잠을 선택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랬는데 다시 저 문을 보고 있다니.

사리엘이 오늘 이 문이 열리는 일은 없다. 없으니 침대에 누워서 눈을 감으라는 마음의 목소리를 따라 문을 보던 눈을 돌리려던 순간이었다. 굳게 닫힌 문의 손잡이가 돌아가며 문이 열렸다. 
아름다운 플래티나 블론드와 하늘색 눈동자를 가진 여성이 사리엘을 보다가 손가락을 흔들었다. 사리엘의 손가락과 여성의 손가락을 이어놓은 인연의 실이 흔들렸다.

“당신이 전생의 내가 이 실로 연결한 사람이구나.”

그녀였다. 사리엘의 저주를 풀어주고 싶다는 마음으로 인연의 실을 만들어서 사리엘의 손가락에 걸어놓은 사랑스러운 연인의 환생. 사리엘은 아직 이름을 모르는 그녀의 앞으로 걸어갔다.

“전생을 믿나?”
“처음에는 믿지 않았어. 하지만 진실이라면 내가 부정한다고 바뀌지 않잖아.”

그녀는 하늘색 눈으로 사리엘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뜯어보다 품에서 꺼낸 투명한 액체가 든 병을 사리엘에게 건네고 말했다.

“마셔. 당신의 저주를 풀어줄 거야.”
“확신하는군.”
“내가 만드는 약은 굉장하거든.”

자신의 재능을 증명하는 삶을 살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그녀의 말에 얼굴에 번지려는 웃음을 참은 사리엘은 병 속의 액체를 마셨다. 몸을 좀먹어가던 저주의 기운이 몸에서 완전히 사라진 것을 느낀 사리엘은 짧은 감사의 인사―무뚝뚝한 고마워.―를 건네고 그녀를 보았다.

“약값을 지불해야겠지만 가진 것이 없군.”
“가진 것이 없다니. 저주가 풀린 당신의 건강한 몸은 당신의 것이잖아. 틀려?”
“네 말이 맞아. 내가 이 몸으로 뭘 하기를 원하지?”
“나를 도와서 일해. 다양한 일을 시킬 거니까 각오는 해둬, 당신. 이름을 모르고 당신이라고만 부르니 불편하네. 통성명부터 하자.”

나는 리즈벳. 리즈벳이야. 당신은?
리즈벳이 웃었다. 그녀의 애칭도 엘리자베트와 마찬가지로 리지라는 사실을 알았지만 사리엘은 그녀를 처음부터 리지라고 부르지 않기로 했다. 그 이름은 처음부터 부르기엔 무리가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만 허락하는 애칭인데다, 사리엘은 리즈벳이 어떤 사람인지 몰랐으니까.

“그래, 리즈벳. 나는 사리엘. 네가 원하는 대로 불러. 그런데 나를 네 일을 도울 사람으로 고용해도 괜찮겠나?”
“괜찮으니까 제안하는 거야.”
“내가 너를 전생의 그 사람으로 본다면?”
“나는 그 사람이 아니라고 당신에게 분명히 말해줄게, 사리엘.”

단호하게 말한 리즈벳이 방을 천천히 둘러보다가 방 밖으로 나갔다. 전생을 보았음에도 이 방의 물건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 리즈벳의 모습에서 사리엘은 엘리자베트를 볼 수 없었다. 말만이 아니라 정말로 그녀는 리즈벳인 것이다. 그런 그녀와 쌓아올리게 될 관계가 자신과 자신의 세계를 어떻게 변화시킬지 알지 못 하는 과거의 망령은 방을 마지막으로 눈에 담았다.

“안녕, 리지.”

마지막 인사를 남기고 방을 나가는 그를 영웅을 사랑하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 기다리고 있을 변화한 세계와,

“얼른 와, 사리엘.”

새로운 인연이 반겼다.


*


“시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를 듣고 사리엘이 바로 반응하지 않으면 안경을 가볍게 건드리는 것은 리즈벳의 버릇이었다. 리즈벳의 손이 가볍게 건드리는 바람에 조금 내려간 안경을 고친 사리엘은 전생의 자신이 연결한 인연의 실을 끊으면서 자신의 마음을 고백한 당찬 연인의 팔을 잡아당겨 자신에 비해 한참이나 작은 연인의 몸을 품에 안았다.

“네가 부탁한 일이 아직 안 끝났는데 날 건드린다는 건 지금까지 내가 일하면서 참았던 모든 욕망을 받아준다는 뜻일까, 리지?”
“시엘은 안 받아준다고 거절해도 받아주게 만들 사람이잖아.”

칭얼거린 리즈벳이 두 팔로 사리엘의 목을 감고 입술을 달싹였다. 사랑해, 시엘. 나도 사랑해. 라고 대답하고 리즈벳의 목에 얼굴을 묻으려는 사리엘을 리즈벳의 손이 막았다.

“누구를 사랑해? 정확히 말해줘.”

전생의 자신이 아니라고 분명히 말해주겠다고 했던 리즈벳의 질문이 어떤 의미인지 아는 사리엘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게 해주고 싶은 연인을 보았다.

“리즈벳.”

나를 구하러 온 너를 사랑해.
만족한 리즈벳이 손을 치웠다. 말보다 확실한 허락을 두 눈으로 확인한 사리엘의 입술이 리즈벳의 목에 닿았다. 사랑과 욕망이 뒤엉킨 열락의 밤이 시작되리란 사실을 알리듯이.


*
시엘리지 9주년 축하합니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에유지만 전생과 환생에 관한 이야기를 + 시엘의 기다림에 대한 이야기를 써보고 싶었어요.
전에 시엘보다 리지의 내면이 더 강하다는 썰을 썼었는데 그걸 연성으로 조금이나마 푼거 같아서 기쁘네요.
행복한 2월 14일 보내시고 9년이란 긴 시간 동안 함께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려요. 크림님이랑 리지가 아니었으면 9주년이 되기 힘들었을 거에요. 크림님이랑 리지 많이 좋아하고 사랑해요.
항상 건강하시고 따뜻하고 행복한 겨울 보내시기 바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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