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나의 기적
01.
신이 내린 저주라고 불렸던 망각의 병을 고치는 하얀 물망초가 겨울이 시작되기 하루 전에 지는 나라, 캐롤리나에는 공주가 없다. 물망초를 만들어서 세계에 망각의 병을 치료하는 기적을 선물한 사람은 캐롤리나의 공주였음에도. 시간이 흐르고 그리젤다의 모국인 스토에카스를 포함한 여러 나라에서 캐롤리나의 기적은 예전과 같은 힘을 지니지 못 했다. 만약 예전과 같은 힘을 지녔다면― 마른 꽃잎을 닮은 그리젤다의 갈색 눈에 마차가 주는 불편함을 온 힘을 다해 견디며 평온을 가장하는 ‘공주’의 모습이 담겼다.
불편하신가요? 하고 말을 건네면 베일 너머로 보이는 얼굴에도 불편함이 깃들겠지. 그건 곤란했다. 비록 정략결혼이었지만 그리젤다 페러그린은 공주―클레어 리우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그녀를 스토에카스의 사람으로 만들어야했다. 그것이 그리젤다가 어린 시절부터 주군으로 모신 왕의 명령이었다. 공주가 태어나지 않은 나라가 급하게 만들어서 스토에카스로 보낸 공주, 클레어가 고개를 돌려 마차 밖을 보았다. 그 모습을 반사적으로 쫓으려던 갈색 눈을 돌리며 그리젤다는 깨달았다. 새하얀 베일과 함께 흔들리는 검은 머리카락과 새로운 세상을 담은 검은 눈동자를 가진 캐롤리나의 공주가 나라를 떠나는 이 상황에도 한 번도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02.
왕의 명령은 클레어를 스토에카스의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보통 사람들은 결혼으로 그 일을 성공했다고 생각했지만 왕은 달랐다. 왕은 캐롤리나에서 스토에카스로 시집 온 공주가 낳은 아이를 원했다. 빠를수록 좋지. 라고 말하며 왕이 그리젤다에게 준 시간은 2년이었다. 본래 주어진 시간은 1년이었으나 며칠간 클레어와 같은 집―사용인들도 있었지만.―에서 생활하게 된 그리젤다는 1년으로는 부족하다는 판단을 내리고 왕에게 시간의 연장을 요구했다. 허가를 받은 그리젤다는 왕과 나눈 대화가 같은 집에서 사는 부인과 나눈 대화보다 많다는 것을 깨닫고 쓰게 웃었다.
“하지만 말이야.”
결혼했다는 사실은 받아들였지만 남편과 이 집의 존재는 아직 낯선 클레어는 그리젤다와 긴 대화를 나누지 못 했다. 계기가 필요했다. 친해질 계기. 친해지기만 하면 왕의 명령은 금방 해결할 수 있다. 그리고 그리젤다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자신을 보면 긴장했지만 피하거나 도망치지 않는 클레어가 마음에 들었다. 왕의 명령이라고 해도 클레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면 그리젤다는 정략결혼한 부인과 친해지겠다는 생각을 품지 않았으리라. 그럼 클레어가 좋아하는 것부터 ‘직접’ 알아보겠다. 고 마음먹으며 그리젤다는 찻잔을 들었다.
03.
“책 좋아해요?”
“…좋아해요.”
“다행이네. 혹시 더 필요한 책이 있다면 말해줘요.”
“말해도 되나요?”
“그럼요. 우리는 부부잖아.”
부부. 강조하지 않았음에도 그 단어를 들은 클레어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괜찮다고 말했지만 괜찮게 보이지 않았던 클레어를 보고 나중으로 미룬 초야 때도 보지 못 했던 색다른 반응을 본 그리젤다는 웃음을 참으며 클레어의 옆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클레어가 보는 책은 소설이었다. 최근에 마지막 권이 나온 연애 소설. 다른 연애 소설에는 관심이 없는 그리젤다였으나 클레어가 손에 든 저 소설은 좋아했다. 모든 고난을 겪은 두 사람이 행복해진 결말이라는 것도 좋았다. 읽었던 페이지에 책갈피로 표시한 뒤, 책을 덮은 클레어가 그리젤다를 보았다.
“페러그린…”
“당신도 페러그린인데요, 클레어.”
“그리젤다…”
“리제라고 해. 그렇게 불리는 걸 더 좋아하니까.”
선택을 내리지 못한 검은 눈이 흔들렸다. 그리젤다는 그 흔들림을 가만히 지켜보며 클레어의 결정을 기다렸다. 드디어 결정을 내렸는지 클레어의 흔들리던 검은 눈이 평온을 되찾았다. 그리고 아주 많은 용기를 낸 그녀는 입술을 움직여 리제. 하고 그리젤다를 불렀다. 리제. 많은 사람이 불렀던 제 애칭은 이렇게 조심스럽게 부르는 사람은 클레어가 처음이었다.
“이 소설의 어떤 부분이 좋았어요?”
“주인공들이 행복해지는 결말이 좋았어요. 클레어는요?”
“나도, 그래요.”
끝날 거라고 생각했던 클레어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자신을 울린 장면, 자신을 웃긴 장면. 그리고 몰입해서 본 장면들을 애칭을 부를 때보다 부드럽고 행복한 목소리로 이야기하는 클레어를 가만히 바라보던 그리젤다는 “리제는, 어떤 장면이 좋았어요?”라는 질문에 여유를 잃고 고민에 빠졌다. 빠져나갈 방법은 많았다. 하지만 겨우 찾아온 길게 대화할 기회를 놓치고 싶지는 않았다. 결국 그리젤다는 자신이 본 그 소설의 모든 내용을 긁어모아 글로 쓰면 백배는 더 빠르게 썼을 감상을 입으로 써야했다. 입으로 쓰는 감상문을 쓰느라 지금까지의 여유가 사라졌음에도 클레어는 그런 부분을 이용하지 않았다. 타인의 약점을 이용하지 못 하는 공주의 검은 눈이 반짝인다. 방금 전까지 그리젤다가 이야기한 부분을 자신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말하는 클레어의 이야기를 듣고 반응하던 그리젤다는,
“클레어. 앞으로도 이렇게 대화해줄래?”
클레어의 손등에 입을 맞추며 그녀의 대답을 기다렸다. 클레어의 순수한 호의를 그녀와 친해질 기회로 이용하려는 자신을 언젠가 클레어가 미워해주기를 바라며.
04.
캐롤리나의 물망초로 만든 차는 모든 나라가 물 다음으로 많이 마시는 음료였다. 스토에카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같은 찻잎이라도 나라마다 끓이는 법이 조금씩 차이가 났다. 클레어가 캐롤리나의 방식으로 끓인 차는 스토에카스의 차보다 부드러웠다.
“클레어를 닮은 차네.”
찻잔을 내려놓고 이제는 자신과 거리가 가까우면 다른 이유로 긴장하는 클레어의 뺨에 입을 맞춘 그리젤다는 처음 입을 맞췄던 때처럼 놀라지 않는 클레어를 보았다. 내일은 ‘나중’으로 미뤘던 두 사람의 초야였다. 이전보다 친해지기는 했으나 입과 입으로 하는 입맞춤도 나누지 못한 상태에서 초야라니. 왕은 재촉하지 않았으나 시간은 흐르고 있었다. 벌써 두 달이었다. 기한이 1년이었다면 그리젤다를 초조하게 만들었을 정도로 시간은 빨랐다.
“사람은 차와 닮을 수 없어요.”
“나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어요, 클레어.”
정말로 닮았는데. 하고 어리광 부리듯이 어깨에 얼굴을 비비자 클레어의 손이 이전보다는 좀 나아진―그러나 여전히 서툰― 솜씨로 그리젤다를 다독였다. 머리를 쓰다듬고 등을 토닥이고. 자신을 다독이는 클레어의 손길을 받으면 그리젤다는 많은 것을 잊고 싶어졌다. 왕의 명령. 나라의 이득을 위해 결혼했다는 사실. 그런 것들을 잊으면 클레어와 자신만 남으리라. 하지만 그리젤다는 알고 있었다. 왕의 명령과 나라의 이득이 아니었다면 자신과 클레어는 함께하지 못 했으리라.
시작은 조금 뒤틀렸을지라도 무언가가 피어난다. 나라의 복잡함 속에서 기적을 만든 캐롤리나의 공주를 예전보다 조금 이해하게 된 그리젤다는 클레어의 어깨에 비비던 얼굴을 들었다. 그리고 숨소리가 들릴 정도로 거리를 좁혔다. 그녀가 밀어낸다면 이번 초야도 나중으로 미룰 각오를 했던 그리젤다의 귀를,
“키스해줄래요?”
함께 먹은 디저트보다 달콤한 목소리가 두드렸다.
05.
입맞춤으로 끝내지 못 하고 방까지 들어오고 만 것은 자신의 실수였다. 미안해요, 클레어. 침대에 누운 클레어를 보고 상황을 파악한 그리젤다의 사과의 말을 들은 클레어는 고개를 좌우로 휘저었다.
“바라고 있었어요.”
언제부터? 라는 외침을 겨우 삼킨 그리젤다의 목을 클레어의 두 팔이 휘감았다. 두 팔이 떨림을 통해 그리젤다는 클레어 역시 많은 것을 견디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다른 사람들과 다른 뒤틀린 시작. 비록 사랑이 피었다고 해도 그것을 전하기 위해서는 많은 용기를 필요했다. 끝내 엇갈리고 만 그리젤다의 부모가 그랬듯이.
“모든 것을 클레어에게 주기 전에 전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우리의 시작과 앞날은 평범하지 않겠지만 내 마음만은 언제나 진실할 거야.”
“그 진실한 마음이 어떤 것인지 우리가 많은 대화를 나누게 해준 그 소설처럼 분명하게 말해줄래요, 리제?”
그걸로 나는, 많은 것을 견딜 수 있을 거예요.
많은 것을 버리고 나라를 떠나 자신의 곁으로 온 클레어의 눈에 처음으로 눈물이 맺혔다. 결혼해서 나라를 떠나던 순간에도 울지 않았던 그녀를 울린 것이 자신이라니. 맺힌 눈물을 조심스럽게 닦아주던 손을 떼어내고 눈가에 입 맞추기 시작한 그리젤다는 클레어의 눈물이 사라진 이후, 많은 것을 견딜 거라고 말한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서로의 숨결을 얽는 입맞춤이 끝나고 숨을 고르는 소리가 들리는 침대 위에서 그리젤다가 입술을 움직였다.
“클레어를 사랑해. 그러니까…”
내 전부를 받아줄래요?
그리젤다의 품으로 찾아온 기적이 입술을 겹쳤다. 가장 확실한 대답이었다.
*
리제클레어 4주년 감사합니다~ 축하합니다~ 사랑합니다~!
4주년인데 연성이 없으면 허전할거 같아서 연성도 함께 가져와봤습니다. 선결혼 후연애 리제클레어.uu!
즐겁게 읽어주시고 오늘도 좋은 하루 보내시고 항상 건강하시길 바라요!
4년이란 긴 시간 함께 해주셔서 감사하고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쏘님이랑 클레어 제가 많이 좋아하고 사랑해요!^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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