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지 못할 오늘
한 학년 위의 선배지만 졸업할 때까지 대화해보지 못 하고 끝나버릴 인연. 그것이 도서관에서 스치듯 본 클레어 리우에 대한 그리젤다 페러그린의 첫 인상이었다. 대화조차 나누지 못한 클레어를 두 번째로 도서관에서 봤을 때, 그리젤다는 마음의 메모장을 열어 클레어의 첫 인상에 ‘책을 무척 좋아하는 것처럼 보인다.’를 추가했다. 책의 세계를 탐험하는 클레어의 얼굴이 도서관에 있는 어떤 학생들보다 진지해보였던 탓이다.
책의 세계를 탐험하는 클레어의 두 눈에 자신의 모습을 담기게 하고 싶다는 나쁜 생각이 그리젤다의 머릿속을 스쳤다. 하지만 행동으로 옮기지는 않았다. 기회가 오면 대화를 나눠보고 싶은 착한 선배를 괴롭힐 정도로 나쁜 사람은 아니었으니까. 내용은 모르겠지만 표지는 제법 마음에 드는 책을 빌려서 도서관을 나온 그리젤다는 기숙사로 돌아갔다.
도서관에서 빌린 책의 내용은 표지와 다르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예측 가능한 내용들이 계속되던 책은 ‘모두 행복하게 살았다.’는 평범하고 지루한 끝을 맞이했다. 책을 덮은 그리젤다는 혼자 쓰는 넓은 방의 침대에서 천장을 보며 책의 결말을 곱씹었다. 두 번 정도 곱씹은 그리젤다는 이 결말이 최근 자신의 학교생활과 비슷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평범하고 지루한. 답답함이 차오른 그 순간, 방의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젤다는 이 답답함을 멈춰준 사람에게 마음으로 감사하며 문을 열었다.
“그리젤다 학생.”
그리젤다가 사는 기숙사의 통금 시간은 10시였다. 지금은 10시 20분. 20분을 넘어가주는 다정한 교수도 있었지만 이번은 운이 나빴다. 학교에서 제일 고지식하다고 소문이 난 교수는 눈썹을 몇 번 꿈틀거리더니 입술을 열었다.
“20분을 넘어가주는 물렁한 교수도 있지만 나는 그런 교수들과 다릅니다. 도서관을 청소하세요.”
주말에. 알겠습니까?
통금 시간이 평일보다 더 자유로운 주말에 도서관을 청소하라니. 20분의 지각에 내려진 벌치고는 과하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그리젤다의 눈앞에 있는 교수는 반문을 용서하지 않는 타입이었다.
“알겠습니까?”
“네, 교수님.”
그리젤다가 순순히 대답하자 교수는 몸을 돌렸다. 그리젤다는 교수의 뒷모습이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되자 방으로 돌아갔다. 낮과는 다른 세계처럼 보이는 밤의 학교를 탐험하고 싶은 마음을 누르며.
콜록. 벌써 몇 번째의 기침인지. 투덜거림을 삼키며 그리젤다는 이 기침의 원인인 먼지를 마른 꽃잎을 닮은 갈색 눈에 담았다. 혼자 청소하기에는 넓은 도서관은 먼지가 많았다. 마법을 사용했다면 먼지 따위는 보이지도 않았을 테지만 학교는 그리젤다가 입학하기 전부터 청소에 마법을 사용하는 일을 금지시켰다. 마법에‘만’ 의지하는 일을 막기 위한 학칙이라고 했다. 도움이 되는 학칙인지는 여전히 의문이었으나, 이 의문을 해소하기 위한 고민에 빠진다고 청소가 끝나지는 않았다. 생각을 멈추고 청소도구를 잡은 몸을 움직이던 그리젤다는 바닥을 밟는 발소리에 움직임을 멈추고 발소리의 주인을 바라보았다.
검은 머리카락과 검은 눈동자를 지닌 책을 무척 좋아하는 선배, 클레어 리우가 그리젤다의 눈에 담겼다. 원하는 책이 있는 장소로 걸어간 클레어의 뒷모습을 눈으로 쫓던 그리젤다는 마땅한 곳이 없어서 내려놓지 못한 청소도구를 바라보다가 클레어의 곁으로 다가갔다. 누군가의 기척을 느낀 클레어의 얼굴에 긴장과 놀람이 번졌다. 그 사실을 알아챘으면서도 무시하기로 한 그리젤다가 클레어에게 말을 걸었다.
“안녕.”
“안녕하세요.”
“그리젤다 페러그린. 리제라고 불러도 좋아요.”
“…클레어 리우에요.”
“관심 있는 책이 높은 곳에 있다면 말해줘요. 언제든 달려올게.”
“고마워요. 하지만 내가 원하는 책은 그렇게 높은 곳에 꽂혀있지 않아요.”
아쉽다는 말을 삼킨 그리젤다는 클레어의 얼굴에 번진 긴장과 놀람이 아까보다 희미해진 것을 발견했다. 인사만 빠르게 하고 도망칠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리젤다의 예상을 멋지게 깨버린 착한 선배는 신중히 책을 골랐다. 한 권. 두 권. 혼자서 들기에 적당한 양의 책을 손에 넣은 클레어는 다른 사람들과 멀어질 수 있는 위치의 의자에 앉아서 책을 보기 시작했다. 페이지가 넘어가는 소리를 들으며 그리젤다는 생각했다. 내일 청소할 때도 클레어가 오면 좋겠다고.
다음 날에도 클레어는 도서관에 왔다. 청소를 클레어가 오기 전에 마무리한 그리젤다는 환히 웃으며 도서관으로 들어오는 클레어를 맞았다.
“어서 와요, 선배. 오늘은 무슨 책을 볼 거야?”
어제보다 덜한 긴장과 놀람이 번진 얼굴로 그리젤다를 바라보던 클레어가 입술을 열었다. 수업과 관련된 책 속에 그리젤다가 책의 표지가 재미있어보여서 빌렸던 그 책이 있었다. 평범하고 지루한. 왜 그 책을 골랐는지 궁금해진 그리젤다가 그 책의 제목을 말하며 선배가 좋아하는 책이에요? 하고 물어보니 클레어는 생각에 잠겼다가 입술을 열었다.
“좋아하는 작가분의 책이에요. 스쳐 지나가버릴 수 있는 일상의 이야기를 써주세요. 평범하고 지루하다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게 매력이에요.”
“선배가 제일 재미있게 본 책은 뭔데요? 알려줘.”
나도 읽고 싶어졌거든요.
*
다른 사람들과는 금방 친해졌던 그리젤다였지만 클레어와는 금방 친해지지 못 했다. 계단을 올라가듯이 천천히 친해진 끝에 그리젤다는 클레어를 선배가 아닌 클레어라고 부르고 있었다. 그리젤다를 리제라고 부르는 것이 처음보다 자연스러워진 클레어와의 대화는 만남이 거듭될수록 길어졌다. 관계가 깊어질수록 클레어가 하는 말들이 늘어났기 때문일까. 아니면―
“오늘은 평소보다 책이 많네. 클레어, 이 책들을 반납일까지 다 읽을 수 있겠어요?”
“반납일까지 다 읽지 못 하면 곤란해요.”
“책이 클레어를 곤란하게 만들 때도 있네요. 이런 일은 처음 보는 것 같아.”
“졸업을 준비하기 위해서니까요.”
졸업. 생각지도 못한 단어에 클레어와 대화하던 그리젤다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클레어 리우는 그리젤다보다 먼저 들어온 선배였고, 학교는 영원히 머무는 장소가 아니라 더 넓은 세계로 나아가기 위한 장소였다. 클레어가 먼저 학교를 떠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알고 있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복잡한 감정이 드는 걸까.
“리제, 왜 그래요?”
바로 옆에서 들려오는 걱정이 담긴 클레어의 목소리에 얼굴에 다시 웃음을 그린 그리젤다는 클레어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아무 일도 아니에요. 괜찮아. 이제 이 책들을 책상으로 옮기죠. 오늘도 어느 정도는 도서관에서 읽고 갈 거잖아.”
졸업이라는 현실을 차근차근 준비하는 클레어를 배웅해준 뒤, 기숙사로 돌아온 그리젤다는 침대에 누웠다. 진정되었다고 생각한 복잡한 감정은 클레어와 헤어지고 혼자가 되자 다시 찾아와 그리젤다를 괴롭혔다. 짜증이 치민 순간, 그리젤다는 클레어가 꼭 읽어봤으면 좋겠다고 추천한 책을 보았다. 클레어와 친해지게 된 계기를 만들어준 그 작가의 책이었다. 책의 표지를 쓰다듬던 그리젤다는 클레어를 생각했다.
-리제.
자신을 다정하게 부르는 클레어의 목소리가 졸업하면 사라진다니. 자신이 이 당연한 현실을 납득할 수 없는 이유를 깨달은 그리젤다는 책을 쓰다듬던 손을 멈췄다. 사랑. 그랬다. 소년은 사랑하고 있었다.
이제 곧 졸업해버릴 소녀를. 이 책을 추천해준 소녀를. 어느새,
-리제.
자신의 일상이 되어버린 소녀를 사랑하고 있었다.
“책은 어땠어요, 리제?”
추천해준 책을 재미있게 읽었냐고 묻는 클레어에게 재미있게 읽었어요. 라고 대답한 그리젤다는 다시 책장으로 고개를 돌리려는 클레어의 손을 잡았다.
“다음에도 클레어가 책을 추천해줬으면 좋겠어.”
“리제가 원한다면 언제든지요.”
“난 그 ‘언제든지’가 길기를 원해요. 클레어를 좋아하거든요.”
많이. 정말 많이.
클레어의 검은 눈동자에 붉게 물든 그리젤다의 얼굴이 담겼다. 근사한 고백을 준비하지 못 했으나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고백을 한 소년을 소녀가 바라보았다. 소녀가 웃으며 한 대답을 들은 소년은 생각했다.
자신은 오늘을 잊지 못할 것이다. 평범한 일상이 특별하게 바뀐 오늘을.
클레어 리우가 그리젤다 페러그린과 같은 마음을 가졌다고 말해준 오늘을.
*
리제클레어 5주년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축하합니다~!
리제클레어가 벌써 5주년이네요! 시간이 정말 빠른거 같아요. 이번 기념일 연성은 이전에 썰로 풀었던 리제클레어 AU로 준비했답니다. 선배랑 후배로 만난 리제클레어가 생각나서 쓰는 내내 참 설렜던거 같아요.
5년이란 긴 시간 함께 해주셔서 감사하고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쏘님이랑 클레어 제가 많이 좋아해요. 사랑해요!^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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