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라는 이름의 마법
라세인의 취향과는 제법 거리가 멀어 보이는 그 로맨스 영화는 ‘세계는 이미 내 건데.’라고 당당히 말하는 상관, 은율의 기분을 맞춰주기 위해 봤던 영화였다. 무거운 숙명을 거부하고 위태롭게 하루하루를 살아가던 은율의 기분은 좋아졌다. 그래서 숙명을 받아들이고 라세인의 상관이 된다면 성에서 지내게 해준다는 말도 안 되는 약속을 한 것이겠지. 시간이 흐르는 속도만큼 몰아치는 일들로 인해 그 일이 잊힌 약속이 되었을 무렵, 은율은 약속을 지키겠다는 말과 함께 열쇠꾸러미와 반으로 접힌 쪽지를 내밀었다.
머릿속에 떠오른 은율에게 성을 빌려줄 수 있는 두 사람의 얼굴을 빠르게 지운 라세인은 감사의 인사를 건네고 카펠라에 있는 제 집무실로 돌아왔다. 의자에 앉은 라세인은 반으로 접힌 쪽지를 펼쳤다. 머릿속에 떠오른 두 사람 중의 한 명이 소유한 성이었으나 은율이 빌렸다면 이야기는 들어갔을 것이다. 이야기가 들어가지 않았어도 문제는 없다. 애초에 문제가 생길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이 성을 빌려주지 않을 사람이었으니까.
“좋아할까.”
문제가 없다는 결론을 내린 라세인은 이 성에서 함께 머물고 싶은 소중한 사람을 떠올리며 휴대폰을 들었다. 연락을 위해 사용할 수 있는 두 가지 선택지인 전화와 문자 중 그는 전화를 선택했다. 아인하르트의 목소리가 듣고 싶었으므로. 신호가 끝나고 전화를 받은 아인하르트의 목소리가 라세인의 귀를 두드렸다.
-좋은 저녁이에요, 라세인.
“아인이 있는 곳은 아침일 텐데.”
-라세인이 있는 곳은 저녁이니까요.
마음 한 구석이 따뜻해지는 대답을 들은 라세인의 얼굴에 웃음이 번졌다. 마법을 사용하면 금방 좁힐 수 있는 거리가 아니라 바로 곁에 있었다면 아인하르트를 보고 웃을 수 있었으리란 생각이 가져온 아쉬움을 털어버리며 라세인이 말했다.
“신경 써줘서 고마워. 아인에게 이 아침이 좋은 시간이길 바라. 그런데 아인. 얼마간 함께 성에서 지내볼 생각이 있나? 여행이라고 생각하면 돼. 그대에게 여행을 가지 못할 바쁜 일이 없다면 말이야.”
“바쁜 일은 없으니 함께 보내요, 라세인.”
아인하르트가 있는 곳의 시간으로 오후에 아인하르트의 곁으로 가겠다고 말한 라세인은 휴대폰의 검은 액정을 보았다. 휴가였지만 라세인의 본업은 세계를 지키는 맹약자였다. 급한 일이 안 생기기를. 소중한 사람과의 시간이 방해받지 않기를 바라며 작은 기도를 한 별은 시간을 확인한 뒤, 자신이 할 일들을 정리했다.
*
두 사람이 묵게 될 성은 제법 컸다. 사람을 고용하지 않으면 청소조차 힘들게 보였지만 이 성의 주인은 사람을 고용하지 않아도 성을 깨끗하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이었다. 항상 깔끔하게. 항상 아름답게.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걸어둔 마법 덕분인지 성은 내부와 정원 모두 깔끔하고 아름다웠다.
“동화 속에 나오는 성 같네요.”
“가시덤불이 없으니 신데렐라겠군.”
“시계와 유리구두가 없는데도요?”
“시계와 유리구두는 없지만 자정이 다가오는 사실에 아쉬움을 느끼는 내가 있으니까.”
라세인은 자신이 웃으며 내민 손 위에 조심스럽게 손을 얹은 아인하르트와 함께 성 밖으로 나와 정원에 위치한 하얀 가제보에 앉았다. 흐린 하늘에서 내리는 약한 여름비가 두 사람의 머리와 옷을 적셨다. 풀과 꽃의 냄새를 두른 두 사람이 가제보에 앉자 거짓말처럼 비가 그쳤다. 별은 보이지 않았지만 여름비가 내린 직후라서인지 공기가 조금 서늘했다. 자신도, 아인하르트도 걸리지 않을 감기가 걱정될 정도로. 손을 놓고 비상용으로 챙긴 상의를 꺼내 아인하르트에게 건넨 라세인은 고마워요. 라고 말하며 상의를 건네받은 아인하르트를 보았다. 안경과 몸에 항상 지니고 있는 십자가 목걸이에 맺혀있던 여름비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처음 만난 날에도 아인하르트가 저 목걸이를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한 라세인은 아인하르트와 함께 불렀던 노래를 떠올렸다. 아인하르트의 목소리와 잘 어울리는 곡을 함께 불렀다. 평화를 기원하며. 라세인의 손에 들린 무기에 재로 돌아간 저택의 주민이라 스스로를 자칭하는 뱀파이어들이 들으면 비웃을지도 모를 일이었으나, 라세인은 아인하르트와 함께 부른 노래가 좋았다. 그리고 함께 노래한 아인하르트를 지금은 좋아함을 넘어 사랑하고 있었다. 이 성에 함께 머물면서 쌓아갈 추억이 즐거움과 행복으로 가득 찼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할 만큼.
“아인, 부탁이 있어. 노래해줄 수 있을까?”
질문을 던진 라세인을 바라보고 미소 짓던 아인하르트가 입술을 움직였다. 움직인 입술에서 흘러나온 노래는 라세인도 잘 아는 노래였다. 가사가 참 예쁘다고 생각하며 듣다가 곁에 있던 아인하르트에게 불러줬던 노래를 지금은 아인하르트가 부르고 있었다. 그 날의 답례처럼 느껴지는 아인하르트의 노래를 듣던 라세인이 입술을 움직였다. 두 사람의 노래가 끝났을 때는 하늘을 흐리게 만든 구름이 사라지고 달빛이 내리고 있었다. 가제보로 스며드는 달빛에 젖은 아인하르트를 보던 라세인이 말했다.
“고마워, 아인.”
“아니에요. 나도 라세인과 같이 노래하고 싶었으니까요. 같이 노래하는 건 굉장히 오랜만이네요.”
“그 뒤로 기회가 오지 않았으니까. 앞으로는 자주 만들지.”
가제보의 의자에서 일어난 라세인은 놓았던 손을 아인하르트에게 내밀었다. 내민 손을 잡은 아인하르트와 함께 성으로 들어가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바람이 스치고 지나간 풀과 꽃이 인사하듯 흔들리는 모습을 보지 못한 두 사람의 걸음이 잠시 멈췄다.
“내일을 위해 오늘은 쉬는 게 좋겠네요.”
아인하르트의 말에 아인의 말에 동의해. 오늘은 쉬지. 라고 대답한 라세인이 아인하르트를 두 팔로 끌어안고 고개를 숙였다. 사랑하는 아인하르트에게 가벼운 입맞춤을 선물한 라세인은,
“오늘보다 좋은 일을 많이 만들어야 할 내일을 위해서.”
아인하르트가 건네주는 자신의 상의를 받으며, 내일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는 오랜 시간을 살아온 사람에게 어울리지 않는 바람을 품었다. 자신이 품은 바람이 낯설지만 반가운 라세인의 푸른 눈에 아인하르트가 담겼다. 두 눈에 가득 담긴 사랑하는 연인이 보석처럼 아름다운 붉은색 홍채와 비취색 눈동자로 바라보며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사랑이라는 이름의 마법을 걸었다. 그 마법에 걸리며 라세인은 생각했다.
푸는 방법이 있어도 이 마법에 다시 걸릴 것이라고. 몇 번이라도.
*
7월 15일에 풀었던 썰 기반으로 랏땅아인. 르네님이 그려주신 연성의 시츄도 넣어본 연성입니다.^ㅁ^!
늘 감사합니다. 더위 조심하시고 항상 건강하시고 오늘도 좋은 하루 되시길 바라요.u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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