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성

틈새

<span class="sv_member">에메트</span>
에메트 @acidcatsle
2026-02-07 18:53

안녕하세요선생님오늘부터 선생님의 제자가 된 파비앙 모로라고 합니다.”

 

귀를 두드리는 밝은 목소리의 주인인 녹빛이 도는 밝은 갈색 머리카락의 청년―파비앙을 눈에 담은 리카르도는 생각했다그 남자의 짓인가같은 성을 사용하고 있지만 한 공간에 있는 것조차 끔찍한 양아버지가 아니면 자신에게 제자라는 이름을 가진 짐을 붙일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왜 제자를 붙였는지 캐내고 싶은 욕망이 샘솟았지만 리카르도는 이 욕망을 신중하게 내보여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상대가 양아버지인 로베르토가 보낸 사람이라면 더더욱.

 

리카르도 스칼리에티앞으로 잘 부탁하지.”

 

본심을 능숙하게 감춘 리카르도가 손을 내밀자 파비앙은 내밀어진 리카르도의 손을 잡았다손의 감촉이 아닌 가죽 장갑의 감촉을 느낀 리카르도는 눈만을 움직여 파비앙의 손을 보았다리카르도의 눈에 담긴 파비앙의 손은 얇은 고동색 가죽 장갑에 감싸인 상태였다벗으라고 하면 장갑을 착용한 이유를 알 수 있겠지만 리카르도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어차피 파비앙이 저 장갑 속에 무언가를 감추고 있더라도 감춘 무언가를 드러내는 순간은 리카르도가 기다리는 순간이었으므로.

 

그럼 이제부터 그대가 살게 될 이 집을 안내해주지.”

 

집보다는 저택에 가까운 규모였지만 스칼리에티라는 이름을 받은 날부터 이런 규모의 저택을 집으로 삼고 살았던 리카르도에게 이곳은 집이었다자신의 현재와 미래가 전부 담겨있는 자신의 집먼저 걸어가는 리카르도를 파비앙이 뒤따랐다걸음 소리는 파비앙의 체격만큼이나 가벼웠다.

 

리카르도가 마지막으로 파비앙을 안내한 곳은 집 왼쪽에 위치한 별채였다별채 전부를 연구실로 사용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도 반응하지 않았던 파비앙의 진녹색 눈은 별채에 들어선 순간반짝이기 시작했다마법사 특유의 호기심으로그 모습에서 리카르도는 로베르토의 양자가 되기로 결심한 그 날을 떠올렸다재능이 있다는 말로 자신을 유혹하며 금기의 마법을 완성할 실험체로 이용하려던 그 남자는 이 청년을 어떤 말로 꾀어냈을까로베르토가 아직도 사람을 살리는 금기의 마법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아는 리카르도가 책장에 꽂힌 책들을 구경하는 파비앙에게 물었다.

 

내 양부와 어떻게 만났는지 물어봐도 되나?”

 

책장에서 고개를 돌려 리카르도를 바라본 파비앙이 웃었다.

 

제가 선생님이 증오하는 양부로베르토 스칼리에티의 추천을 받은 제자이기 때문인가요?”

맞아받아들였지만 내가 그대를 앞으로 끊임없이 의심할 거란 사실도 미리 이야기 해두지.”

끊임없는 의심 좋네매번 겪어왔던 일이라 무섭지도 않으니 마음껏 해봐요선생님.”

매번?”

당신의 제자는 거리 출신이거든.”

 

말을 마친 파비앙은 책장에 꽂혔던 마법서 한 권을 꺼낸 뒤리카르도의 곁으로 다가왔다파비앙의 진녹색 눈이 리카르도를 올려다보았다도전적으로누군가에게 이용당하는 눈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눈이었다오히려 살기 위해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를 이용한다면 어울릴까어떤 모습이 진짜일지 캐내는 재미까지 안겨주는 깜찍한 제자의 턱을 리카르도의 손이 들어올렸다파비앙은 그 손을 쳐내지 않았다눈은 여전히 도전적이었는데도.

 

허락하지도 않았는데 편히 말하는군.”

선생님도 그랬잖아피차일반이지.”

그럼 편히 말하도록 해.”

 

턱을 쓰다듬으며 한 말에 고마워선생님이라고 대답한 파비앙은 리카르도의 손을 떼어냈다턱을 들어 올리는 것까지가 파비앙 모로의 허용범위인 모양이다기묘한 선이었다그어진 것은 분명한데 경계를 가늠할 수가 없다는 점에서파비앙이 몸을 돌렸다할 일이 있으면 불러달라는 말을 남기고 별채를 나가는 파비앙의 뒷모습을 눈에 담으며 리카르도는 생각했다저 단단한 껍질을 얼마나 들쑤셔야 진실을 손에 넣을 수 있을까.

 

*

 

제자를 들인 적이 없는 리카르도도 알 수 있을 정도로 파비앙은 무엇이든 빠르게 배웠다한 번 가르친 것은 잊지 않았고모르는 것들은 솔직하게 사실을 밝히고 물어왔다정말 제자를 들인 기분이었으나 파비앙 모로는 로베르토가 붙인 제자였다속셈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잘못된 방법으로 가르칠 거라는 생각은 안 하는 거냐고 물었던 날파비앙은 손에 들었던 도구들을 책상에 내려놓고 말했다.

 

-잘못된 방법으로 마법을 가르치는 추한 방법을 쓸 사람이었다면 로베르토 옆에 붙어있었겠지.

 

그런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로베르토의 추천을 받아 내 밑에 들어왔냐는 말을 삼킨 리카르도는자신의 모든 마법을 흡수하려는 것처럼 바라보는 파비앙이 모르는 마법을 올바른 방법으로 가르쳤다하지만 최근 연구하고 있는 마법은 제자임에도 선을 그었다뛰어난 제자라고 해도 로베르토라는 연결고리를 가진 파비앙 모로를 완전히 신뢰할 수 없었으니까.

 

신뢰하려면 파비앙의 목적을 알아야 했다그 목적을 알면 왜 로베르토의 추천을 받아서 자신의 제자가 되었는지도 알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리카르도의 손이 읽던 책을 덮었다.

 

거리 출신마법에 적당한 재능이 있음그리고…

 

목적을 숨기고 자신의 제자로 들어옴지금까지의 정보를 나열한 리카르도는 의자에서 일어났다때가 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은 리카르도의 특기였지만 지금은 기다리기만 해서는 답이 나오지 않았다이제 끌어내야했다지금까지와는 조금 다른 방법을 써서.

 

내일부터 그대에게 과제를 내주지.”

하나뿐인 제자에게 네 연구를 돕게 할 생각은 없어?”

그대는 내가 뭘 연구하는지 모를 텐데.”

금기의 마법이 아니라는 사실은 알지.”

그리고?”

그 정도만 알아.”

 

리카르도는 자신의 연구가 금기의 마법이 아니라는 사실 외에는 모른다고 말하는 파비앙을 보았다거리에서 태어난 마법사의 재능을 가진 아이들은 귀족의 집에 들어가거나 마법사의 집에 들어간다둘 다 끝은 비참했다귀족의 집에 들어가면 그 집안의 후계자를 위한 연료로 쓰이다 죽었고마법사의 집에 들어가면 실험체가 되어 죽었으니까리카르도는 거리에서 태어나지는 않았으나 금기의 마법을 위한 실험체가 될 위험을 피해서 도망쳤다그럼파비앙 모로는 어느 쪽인가.

 

연구를 돕고 싶다면 진실을 드러내야지제자님.”

내가 선생님을 믿게 된다면.”

 

그 전에는 안 돼라고 말한 파비앙이 리카르도의 곁으로 다가왔다하지만 선생님의 외모는 내 취향이야라고 속삭인 파비앙의 입술이 리카르도의 뺨에 닿았다뺨에 가벼운 입맞춤을 남기고 떨어진 파비앙은 돌아보지 않고 방을 나갔다리카르도는 자신의 외모가 취향이라는 파비앙의 말을 곱씹으며 중얼거렸다취향외모가 취향이라는 말이 사실이라면 써먹을 수 있는 방법이 있었다.

 

미인계라.”

 

한 번도 써본 적이 없는 방법이었으나 써야했다파비앙 모로가 아군인지 적군인지 확실히 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으니까.

 

*

 

리카르도가 파비앙이 아군인지 적군인지 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판단한 미인계를 대체 어떻게 써먹을지 고민하던 어느 밤이었다비가 요란하게 내리는 소리를 듣고 방 밖으로 나와서 복도를 걷던 리카르도는 막 방문을 열고 나온 파비앙을 보았다평소와 분위기가 다른 파비앙의 곁으로 다가가자 파비앙의 손이 리카르도의 옷깃을 잡았다지적을 할지 말지 고민하던 리카르도는 미안이라고 힘이 없는 목소리로 말하는 파비앙이 자신의 옷깃을 잡은 손을 떼어내지 못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틈이었다파비앙 모로가 처음으로 보인 틈.

 

이유는 모르겠지만 지금의 그대에게는 내 품이 필요해 보이는군파비앙.”

 

빌려주지.

리카르도의 품에 기댄 파비앙이 눈을 감았다금방 잠으로 떨어진 파비앙을 안고 리카르도는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방의 침대에 파비앙을 눕힌 리카르도는 한동안 깨어나지 않을 것처럼 보이는 파비앙을 바라보았다이용할 생각이었다품을 빌려줄 생각도 없었다하지만 평소와 다른 그 불안한 모습이 리카르도를 다른 방향으로 움직였다.

 

시간은 많으니까.”

 

기다림의 시간이 길수록 그 열매가 달콤하다는 사실을 아는 마법사는 제자가 자는 방을 나와 별채로 향했다.

 

*

 

감사의 인사를 한 파비앙은 리카르도가 어제의 일을 입에 올리지 않자 금방 언제나의 모습으로 돌아왔으나도울 일이 없냐고 묻거나 리카르도가 원하는 물건이 있으면 먼저 꺼내 리카르도에게 건넸다잠깐의 친절이 만든 상황을 즐기기로 한 리카르도는 파비앙이 원하는 대로 행동했다파비앙의 질문에 대답해주고 물건을 건네주면 고맙다고 인사하는 간단한 일은 두 사람 사이에 그어진 선을 더욱 흐려놓았을 때로베르토가 리카르도의 집에 방문했다파비앙은 리카르도가 원하는 재료를 구매하기 위해 외출한 상태라 집에는 리카르도 혼자뿐이었으나 마법사의 집은 마법사의 무기였다연구실이 별채에 있었지만 집 여기저기에는 리카르도의 단어 하나면 로베르토를 없앨 다양한 마법이 준비된 상태였다.

 

네가 제자를 들일 줄이야의외로구나리카르도.”

그대가 추천했을 텐데.”

추천했던 아이는 네가 제자를 들였다는 소식을 듣고 다른 마법사의 제자로 들어갔다.”

 

다른 마법사의 제자라니그럼 파비앙 모로는 누구란 말인가표정을 고친 리카르도는 조금 더 머물 생각이 한 가득으로 보이는 불청객로베르토를 빠르게 쫓아냈다비가 올 것만 같은 어두운 하늘을 보며 머릿속으로 이 복잡한 상황을 정리하던 그 때파비앙이 돌아왔다이런 재료들은 배달을 시켜라고 투덜거리면서 들고 온 짐을 내려놓은 파비앙의 곁으로 다가간 리카르도는 언제나처럼 자신을 올려다보는 파비앙을 보며 물었다.

 

로베르토가 찾아왔었어.”

끈질긴 사람이네.”

오늘은 고맙다고 생각하고 있어파비앙 모로가 로베르토가 추천했던 제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갔으니까.”

……

사실인 모양이군.”

그래사실이야하지만 달라지는 거 없잖아선생님뭐가 달라지는데?”

 

뻔뻔하게 웃는 파비앙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싼 리카르도는 웃음으로 진실이 들켰다는 두려움을 감추는 파비앙의 얼굴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입술을 떼어낸 리카르도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속삭였다.

 

많은 것이 달라지지로베르토가 추천한 제자가 아니라면 파비앙 모로의 진실을 복잡한 방법으로 캐내지 않고 직접 물어볼 수 있으니까왜 내 제자가 됐지?”

살고 싶어서 네 제자가 됐어.”

 

마법의 재능을 가진 거리 출신의 인간이 살 방법은 그것뿐이잖아그래서 정보를 샀어선생님.

정보를 사서 원래부터 박힐 돌을 빼내고 굴러온 돌이 파비앙 모로라는 소리였다살고 싶어서그 이유로 오해를 받으면서도 진실을 말하지 않고 제자의 자리를 차지한 파비앙 모로에 대해 리카르도는 많은 것을 몰랐다하지만 로베르토와 연결고리가 없음을 안 지금의 자신이 안심하는 이유는 알았다마법사리카르도는 자신의 제자인 파비앙에게 관심을 품고 있었다사랑이라는 감정으로 성장하고 있는 관심을틈은자신에게도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한 리카르도가 말했다.

 

곧 비가 오겠지품을 빌려줄 테니 방에서 더욱 긴 이야기를 할까파비앙?”

나랑 이야기만 할 생각은 아닌 것처럼 보여리카르도.”

 

처음으로 이름을 부른 파비앙의 입술에 가볍게 입술을 댔다가 떼어낸 리카르도는 감질 나는 입맞춤은 그만두라는 것처럼 자신의 목을 두 팔로 끌어안고 거리를 좁히는 파비앙을 보며 말했다.

 

맞아.”

 

거절할 건가라는 리카르도의 물음에 고개를 저은 파비앙이 말했다.

 

리카르도 스칼리에티의 외모가 내 취향이라고 말했잖아벌써 잊었어?”

잊을 리가 없지.”

 

솔직하게 외모가 취향이라 말하는 귀여운 제자의 입술을 마법사의 입술이 덮었다.



*

리칼파뱡 9주년 축하합니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뭘로 쓸까 고민하다가 마법사랑 제자 에유가 머릿속에 스스슥하고 스쳐가더라고. 그래서 마법사 리카르도랑 제자 파뱡 에유로~! 랑이가 즐겁게 읽어줬으면 좋겠다. 올해는 9주년이고 내년이면 리칼파뱡이 10주년이구나. 두근두근.

9년이란 긴 시간 함께 해줘서 고맙고 앞으로도 잘 부탁해. 오늘도 랑이사랑파뱡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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