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성

espressivo

<span class="sv_member">에메트</span>
에메트 @acidcatsle
2026-02-07 18:52

이 도시에서 가장 높은 빌딩을 볼 때마다 이 나라의 사람들이 떠올리는 것은 오래 전의 판타지 영화에 나오는 탑이었다흉흉하게 생긴 검은 탑과 수많은 사람들이 방문하는 랜드마크가 된 빌딩이 닮은 부분은 한 부분뿐임에도.

 

티켓을 끊고 다양한 언어로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 속에 섞여서 탑승한 엘리베이터에서 내릴 때까지 소요된 시간은 짧지 않지만 목적지로 삼은 층에서 보는 넓은 하늘은 소요된 시간을 아깝지 않게 만들었다다만같이 이 풍경을 보고 싶다고 생각해버린 사람이 곁에 없었다아쉬움을 삼킨 라세인의 곁으로 먼저 빌딩에 올라온 동료가 다가왔다두 잔의 음료를 양 손에 하나씩 든 강아지를 연상시키는 갈색 머리카락을 하나로 땋은 여성은라세인의 피보호자이기도 한 아이렌이었다손에 든 음료를 라세인에게 건넨 아이렌이 웃으며 말했다.

 

피아노가 있는 층에 있대요방금 세츠 씨에게 확실히 검증했으니 확실해요.”

 

지구라는 이름을 가진 이 푸른별에 살아가는 자들 중 몇몇은 비일상―마법 혹은 이능력이라고 불리는―의 힘에 민감하게 반응했다약하게 반응하면 가벼운 두통으로 끝났지만 심하게 반응하면 힘에 오염되어 일상으로 돌아갈 수 없는 존재로 변하는 경우가 많았다.

라세인과 아이렌을 이 빌딩으로 온 이유는 심한 반응을 만들 가능성을 높여놓은 도구를 회수하기 위해서였다회수라는 조건이 붙으면서 까다로워지긴 했지만 아직 도구는 목적을 달성하지 못 했다임무를 끝내는 순간까지 이 도구가 가진 힘에 휘말리는 사람이 없기를 바라며 라세인이 아이렌에게 물었다.

 

다른 층의 확인은?”

끝냈어요다른 층에는 없더라고요그런데 어디 있는지는 알았어도 사람이 이렇게 많으면…

피아노를 이용하지.”

나 오른손으로 동요 밖에 못 쳐요라세인도 알잖아요.”

피아노는 내가도구를 회수하는 건 그대가.”

 

얼굴에는 이런저런 질문을 던지고 싶은 호기심과 욕망이 가득했지만 그 질문들을 참으며 도구가 있는 장소로 발을 옮기는 아이렌의 모습을 확인한 라세인은피아노가 있는 장소로 향했다피아노는 날개 모양의 소품이 놓인 포토존 옆에 놓여있었다진짜는 아니지만 가짜라도 이 빌딩에서 자신을 한 순간이라도 날 수 있는 존재로 만들어주는 날개 모양에서 사진을 찍는 사람들 옆의 피아노는 운 좋게도 비어있었다귀에 무선 이어폰을 착용한 라세인은 비어있는 피아노 의자에 앉았다자신을 연주하려는 모든 사람을 환영하는 피아노 건반을 후드집업을 입은 청년이 두드렸다.

 

사람들의 시선을 잡아끄는 마법이나 주술을 사용하면 사람들의 시선을 집중시키는 미끼로서의 역할을 더욱 훌륭히 완수했겠지만마법이나 주술은 회수하려는 도구에 영향을 줄 수 있었다임무의 성공과 이 장소의 안전을 위해 선택한 방법에 시선을 빼앗긴 몇몇 사람들이 카메라를 들었다사진을 찍거나 동영상을 촬영하기 위함이었으나 라세인은 개의치 않았다잠깐 스쳐지나갈 뿐인 사람을 오래 기억하는 사람은 없었으니까긴 시간을 살며 수많은 만남과 이별을 반복한 맹약자는 두 번째 연주를 시작하려는 순간에 걸려온 스마트폰의 전화를 받기 위해 잠시 연주를 멈춘 뒤액정을 보았다액정에 사랑스러운 연인아인하르트의 이름이 표시되어 있었다임무가 아니었다면 조금 더 부드러운 표정이었을 라세인은 피아노의 악보대에 올려둔 스마트폰의 전화를 받았다.

 

좋은 아침내가 있는 곳은 아인이 있는 곳이랑 다르게 아침이 아니지만 말이야.”
-라세인이 있는 곳은 오후인가요?
그래오후야태양이 눈부신 오후.”

-이곳의 태양은 아직 눈부시지 않아요몇 시간이 지나면 라세인이 말하는 눈부신 오후가 되겠지만요.

 

아인하르트와 통화를 이어가며 라세인이 연주하기 시작한 곡은 얼마 전아인하르트와 걷던 거리에서 들었던 노래였다같이 온 상대가 다른 사람이었다면 이 일탈이 한동안의 놀림거리가 되었겠지만 오늘 그와 같이 온 상대는 일탈을 비밀로 해줄 수 있는 아이렌이었다기억 속의 노래가 중반부에 접어들었을 때아인하르트가 물었다.

 

-라세인 옆에서 들리는 피아노곡은 전에 같이 들었던 노래네요.

 

기억나요.

대답을 들은 라세인은 문득 이 피아노를 연주하는 사람이 자신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아인하르트의 표정이 궁금해졌다딱딱함이 사라진 편안한 표정을 짓거나 최근 늘어난 웃음을 보여줄까하지만 그 사실을 말하기 위해서는 일에 대한 이야기를 대화의 주제로 올려야 했다평화로운 산책을 하는 연인에게 제 일의 무게를 얹어주고 싶지는 않았던 라세인은 진실을 바닥으로 가라앉히며 입술을 움직였다.

 

나도 기억해아인과 했던 일은 전부 기억하고 있어.”

 

다음에 만나서 할 일도 기억할 거라고 덧붙이며 연인의 평화로운 산책을 응원한 라세인은 두 번째 곡의 연주를 끝내고 의자에서 일어나려다 환히 웃는 얼굴로 자신을 보며 손을 번쩍 들어 올리는 아이렌을 보았다회수 임무를 훌륭히 완수하고 돌아온 아이렌이 활기찬 목소리로 물었다.

 

신청곡도 받으세요?”

아쉽게도 방금 전의 연주가 마지막입니다.”

 

의자에서 일어난 라세인은 아래층으로 내려갈 수 있는 엘리베이터를 타는 계단에서 후드집업을 벗었다정장 차림으로 돌아온 라세인은 먼저 계단으로 향해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으나 시무룩한 표정을 고치지 못한 아이렌을 보며 말했다.

 

신청곡은 다음에 받지오늘은 그대도나도 보고 싶은 사람에게 갈 시간이니까 말이야.”

칼퇴를 하자는 소리네요알았어요대신 다음이라는 약속은 꼭 지켜야 해요라세인.”

 

시무룩한 얼굴을 평소의 웃는 얼굴로 고친 아이렌은 도구는 자신이 반환하겠다고 말하고 먼저 걸어서 내려갔다기분만큼 경쾌한 아이렌의 발소리를 들으며 라세인도 걸음을 옮겼다.

누군가를 구한 히어로가 조용히 일상으로 돌아간 오후의 빌딩을 태양이 비추고 있었다.

 

*

 

원거리 연애였지만 물리적인 거리와 시차 때문에 문제를 겪은 적은 없었다라세인에게도아인하르트에게도 물리적인 거리를 없앨 수 있는 힘이 존재했으니까물리적인 거리가 없어진 순간이 궁금해질 때도 있었지만힘을 시용하지 않고 닿을 수 있는 거리에 살면서 같은 시간을 살아가는 머나먼 미래보다 현실이 중요함을 아는 별은 선물로 준비한 특별한 꽃다발을 들고 연인이 산책하고 있을 숲으로 걸음을 옮겼다.

 

복잡한 도심에서 떨어진 곳에 위치한 숲이기 때문인지 공기가 좋았다아마숲의 좋은 공기에 피비린내가 섞이지 않았다면 라세인의 생각은 변하지 않았으리라주변을 둘러본 그는 꽃다발을 넣고 손에 검을 구현한 뒤피비린내의 근원지로 향했다고요한 숲의 평온을 깨뜨린 피비린내의 원인은 이성을 유지하지 못 하는 뱀파이어들과 정신을 잃은 인간을 지키듯이 뱀파이어들과 대치하고 있는 아인하르트였다유신과의 전투 도중에 아인하르트가 찾아온 저번과는 반대 상황이었고아인하르트가 다친 것 같지는 않았으나 개입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결론을 내린 라세인은 대치 상황을 끝내려는 것처럼 아인하르트에게 덤벼드는 뱀파이어를 향해 손에 든 검을 창처럼 던졌다.

 

사용법이 잘못된 무기에 관통당한 뱀파이어가 비명조차 지르지 못 하고 생명이 끊기는 모습을 본 무리가 주춤했다흡혈충동만을 갈망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성이 없는 저 뱀파이어들도 본능적인 위험은 감지할 수 있는 모양이다타겟으로 삼은 저택의 주민에 속하지 않는 뱀파이어들은 상대측에서 덤벼들거나 흡혈충동에 잠식되어서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상황이 아니라면 되도록 건드리지 않고 내버려두었음에도뱀파이어들의 천적이자 악몽이라 불리게 된 헌터는 그 틈을 타서 연인의 옆에 섰다그리고 마스터인 자신을 아주 짜증스럽게 생각하는 검 형태의 에고웨폰에세리아를 손에 들었다아인하르트의 안부를 물어볼 틈도 없이 몇 마리의 뱀파이어가 더 덤벼들었다.

 

-답을 알고 있습니까?

만난지 얼마 안 되었던 시기에 받았던 아인하르트의 질문에서 느꼈던 무게를 라세인은 덤벼드는 뱀파이어들을 어느새 손에 들린 낫을 휘둘러서 순식간에 정리한 아인하르트를 보며 느꼈다라세인도 오랜 시간을 맹약자로 살아가면서 깨달았지만 불멸자가 견뎌야 하는 긴 인생의 무게는 가볍지 않았다이제야 겨우 편안한 표정을 짓게 된 아인하르트는 짊어지고 있었던 인생의 무게를 조금은 덜어낸 것일까.

지금 하는 생각이 현실이거나 빠른 시일 내에 현실이 되길 바라며 라세인은 앞으로 나아가려는 아인하르트의 검은 장갑을 낀 손을 손가락이 드러난 검은색 손등장갑을 낀 자신의 손으로 잡았다걸음을 멈춘 아인하르트의 손을 놓고 아인하르트의 앞에 선 라세인이 에세리아를 든 손에 힘을 주었다프라가라흐(Fragarach). 대답하는 자라는 뜻을 가진 검을 모티브로 삼아서 제작된 에세리아의 검신에 새겨진 정교한 무늬가 빛났다그 직후모든 것을 날려버리는 바람이 불었다.

다친 곳이 없어서 다행이야.”

 

아인하르트가 사는 저택에 도착한 후에야 아인하르트가 다치지 않았는지를 꼼꼼하게 확인한 라세인은먼저 씻은 아인하르트의 옆에 앉았다피비린내도뱀파이어에게 습격당하는 인간도 없는 평온 속에서 아인하르트가 입술을 움직였다.

 

고마워요라세인.”

아인이 내게 고마워 할 일은 하지 않았어아인이 하던 일을 잠깐 도운 정도야.”

오늘 라세인은 중요한 일을 해줬어요.”

 

자신이 한 어떤 행동이 아인하르트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받을 정도로 중요한 일이었는지를 물어보려던 라세인은 표정은 평소와 같았으나 어쩐지 평소보다 지친 기색의 아인하르트를 보고 입을 다물었다숨소리마저 크게 들리는 넓은 거실에서 눈을 감은 아인하르트가 라세인의 어깨에 기대어왔다곧 고른 숨소리가 들렸다주려는 특별한 꽃은 아인하르트가 깨어난 이후에 주게 되었으나 라세인은 상관없었다선물로 준비한 꽃은 언제든 줄 수 있다그리고 지금은,

 

잘 자아인.”

 

아인하르트의 곁에서 아인하르트의 잠을 방해하는 사람이 없도록 지켜주는 일이 더 중요했으니까별의 손이 잠에 빠진 천사의 손을 잡았다.



*

르네님이 주신 시츄로 쓴 랏땅아인 연성이 왔습니다.

주신 시츄는 [같이 뱀파이어 사냥 하는...모습...이요…!

같이..보다 뱀파이어 헌터 면모를 뽐내는(!중요) 라세인 보고 싶어요!] 였는데 잘 드러났는지 모르겠어요. 혹시 제가 잘못 쓴 부분 있으면 언제든 이야기 해주세요! 오늘도 좋은 하루 되셨길 바라요!!! 늘 감사합니다!


**

espressivo : 음악용어. 표정을 담아서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