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성

빗소리보다 요란한

<span class="sv_member">에메트</span>
에메트 @acidcatsle
2026-02-07 18:51

의외네요길잡이별내 취향대로 꾸미는 건 그만두라고 말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브의 손에서 물건을 넘겨받으려던 라세인의 손이 멈칫거렸다부드러운 외모지만 강아지를 닮은 피보호자와는 다르게 잘 웃지 않는 보호자는 잠시 멈칫거렸던 손을 움직여 이브의 손에 들린 물건을 가져간 뒤주머니에 넣었다자신이 사용하는 가명과 세트처럼 붙어 다니는 사과나무(Le Pommier)라는 이름을 가게에 붙인 마법사의 얼굴은잘 익은 사과가 혀에 남긴 달콤함과 새콤함을 음미하는 사람처럼 만족스러웠다.

 

그대의 행동이 선을 넘는다고 느낀다면 아인이 거절하겠지아인과 그대의 일에 내가 나설 일은 없어그러니 지금까지처럼 편하게 해.”

귀여운 내 친구 아인한테 들려주고 싶은 말이네요들려주지 못 하고 나만 듣는다는 게 아쉬워요길잡이별.”

이브그대가 이 별에서 사귄 유일한 친구에게만은 선을 안 넘는다는 것도 잘 알고 있으니까.”

눈치는 이런 곳에 쓰지 말고 다른 곳에 쓰세요.”

 

가늘어진 보랏빛 도는 검은색 눈으로 라세인을 바라보며 던진 핀잔으로 대화를 마무리한 이브는 얼른 가라는 것처럼 몸을 돌렸다물건―맹약자에게 지급될 다양한 포션―의 가격은 주문한 상관이 이미 지불했을 테니 라세인의 일은 끝이었다품질 확인은 할 필요조차 없다제멋대로지만 이브는 자신이 만든 물건의 품질이 엉망인 것을 엄청나게 싫어했으니까몸을 돌린 채오늘 사용할 술들을 확인하는 이브를 보며 라세인이 말했다.

 

방금 전에 해준 조언 고마워기억해두지.”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지만 이브는 분명 들었을 것이다다음에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이브의 가게를 나온 라세인은 물건을 상관에게 전하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

 

비상상황이 발생하면 물거품이 되겠지만 휴식을 대가로 받고 상관에게 물건을 전달하는 일이 끝난 라세인은일이 끝나길 기다렸다는 것처럼 날아온 보고를 확인하고 문제의 기계를 입수한 부하를 호출했다.

 

부하가 가져온 기계는 예상대로 사람들을 속이기 위해 만들어진 가짜였다뱀파이어를 판독하는 기계라니판독이 가능했다면 뱀파이어를 비롯한 비일상에 사는 자들이 정체를 숨기고 인간과 섞여서 살 수는 없었으리라이 기계 때문에 괜한 분란이 생기는 것은 막아야 한다고 판단한 라세인이 부하를 보았다.

 

이 기계잠시 빌려가고 싶은데.”

 

부르는 가격이 곧 보수가 되는 헌터로서의 유명세를 기계 하나 때문에 이용해먹게 될 줄이야그래도 분란이 생기기 전에 기계를 회수할 수 있었다엄청난 돈을 벌었다고 판단한 사기꾼이 이외에도 테스트기가 하나 있다고 떠벌렸다자신이 만든 마지막 물건까지 파괴되리란 사실을 모르는 사기꾼을 보며 라세인이 말했다.

 

그것도 사겠어.”

 

테스트기를 가진 상대와 직접 만나서 거래하고 싶다는 라세인의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연락을 취하는 사기꾼을 보며 라세인은 생각했다아인하르트가 보면 놀랄까일을 위해서는 이런 거짓말도 해내는 사람이라서놀랐을 때의 아인하르트가 지을 얼굴은 조금 궁금하다고 생각한 그때.

 

방금 전에 만난 사람이 그 기계를 빼앗아갔다고 하는군요.”

 

후손의 잘난 보호자라도 데려오지 않으면 그 기계를 가져갈 수 없다고 했다는 말과 장소를 전하는 사기꾼을 보며라세인은 중얼거렸다.

 

기다리고 있을 테니 찾아오라는 소리군.”

 

침식자라는 이명을 가진 위험한 뱀파이어에게 가장 원하는 사람인 제 피보호자를 내어줄 수는 없었다일이 끝날 때까지 이 소식을 막아줄 사람에게 연락한 라세인은 돈을 기다리는 사기꾼을 보다 쌓인 기계를 향해 팔을 뻗었다.

 

*

 

스스로를 노부(老夫)라고 독특하게 지칭하는 뱀파이어유신이 지정한 장소는 고층빌딩의 옥상이었다옥상에서 떨어질 일은 없다자신도유신도네 번째 손가락에 반지를 낀 왼손으로 문제의 기계를 던졌다 받았다 하는 의미 없는 일을 하는 남자의 얼굴은지칭하는 1인칭과 어울리지 않게 젊었다깔끔하게 잘라서 정리한 흑발 아래에 위치한 안경 속의 갈색 눈에 담긴 오랜 시간이 이질적일 정도로대치하고 있는 유신의 공격에 대비하듯 신성력으로 만든 검 형태의 무기를 손에 쥔 라세인이 말했다.

 

그대는 손에 든 기계에 흥미조차 품지 않았겠지.”

그렇소노부에게 이 말도 안 되는 기계는 미끼일 뿐이오미끼 역할을 훌륭히 수행해줬으니 부수려고 했지만 나타난 고기를 보니 생각이 바뀌었소.”
…말도 안 되는 기계를 순순히 넘겨주는 걸로 끝낼 생각은 없나.”

이 기계를 원한다면 힘으로 가져가시오헌터가 혈족의 손에 들어간 원하는 물건을 탈취하는 유일한 방법은 그것 밖에 없으니까.”

 

말이 끝나기 무섭게 자신을 향해 던져진 공격의 주술을 피하지 않고 검을 휘둘러 파훼한 라세인은 그 틈을 타서 옥상에서 뛰어 내리는 유신을 쫓았다자신을 사랑하는 신들에게 올리는 기도인 신려라면 간단히 해결할 수 있겠지만 기도를 받은 신들은 언제나 대가를 원했다어려지거나잠을 자지 못 하거나혹은… 더 이어지려는 생각을 버리고 이 주변의 지리를 잘 아는 사람처럼 골목길의 어둠으로 숨어든 뱀파이어를 따라 골목길로 들어갔다옥상에 펴놓지 않았던 결계를 하나씩 파훼하는 작업에 만들어낸 검이 형태를 잃었다.

 

이 검으로는 무리란 뜻이군.”

 

에세리아이름에 소환된 은색의 에고 웨폰이 주인인 라세인의 손에 들렸다손에 들린 에고 웨폰을 휘두르자 세찬 바람이 만들어진 몇 겹의 결계를 갈랐다라세인이 만든 바람의 영향으로 날아간 기계가 바닥으로 떨어졌다기계의 고장을 곁눈질로 확인한 라세인이 또 다시 술을 사용하려는 유신의 목에 에세리아를 겨눈 그 순간이었다아무도 접근하지 않아야 했을 골목길에 라세인에게는 낯익은유신에게는 낯선 목소리가 울렸다.

 

라세인.”

 

목소리를 들은 라세인이 보인 틈을 놓치지 않고 거리를 벌린 유신이 주술로 빠르게 만들어낸 날카로운 창이 날아왔다아인하르트라면 피하는 것도반격하는 것도 가능하다는 건 라세인도 알고 있었으나알고 있다는 것과 몸의 반응은 달랐다잠시만. 움직이면서 말하느라 들렸을지 들리지 않았을지 알 수 없는 목소리로 다급하게 말하고 아인하르트를 품에 안고 공격 범위에서 벗어난 라세인은유신이 사라진 것을 확인하자 품에 안은 아인하르트를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뱀파이어의 천적이자 악몽유신을 보내줄 생각이었지만 헌터로 일하면서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모습을 비록 타겟이 아니라고 해도 뱀파이어인 아인하르트에게 보였기 때문인지 마음이 복잡했지만이것은 라세인의 개인적인 마음이었고 시간이 흐르면 알아서 해결될 문제였다복잡한 마음을 정리한 라세인이 아인하르트를 보았다하나로 묶은 회색 머리카락을 고정한 보석으로 장식된 머리 장식은 아인하르트의 취향과는 거리가 멀어보였으나 화려했다제멋대로 사는 마법사이브의 취향이었다이브의 취향이 녹아있긴 했지만 그 장식이 아인하르트와 어울린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었다예쁘다는 칭찬을 꺼내기 애매한 상황임을 아쉽게 생각하며 라세인이 물었다.

 

다친 곳은?”

괜찮아요라세인은…

 

괜찮다고 말하려는 라세인의 뺨에 아인하르트의 검은 장갑을 낀 손이 닿았다항상 작은 상처나 약간의 아픔은 무시하면서 살아온 남자는 자신의 상처를 보고 있는 아름다운 연인을 보며 숨을 삼켰다서로 다른 환경에서 태어난 두 사람이 상대를 사랑이라는 감정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긍정하고 하나의 세계를 만들며 쌓아가는 연애라는 일은상대의 손을 잡고 알 수 없는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었다이 순간도 알 수 없었던 미래 중 하나였다자신을 걱정하고 다정하게 바라보는 소중한 사람이 눈앞에 존재하는 미래.

 

소환했던 에세리아를 돌려보낸 라세인은 주머니에서 작은 상자를 꺼내 손에 든 아인하르트를 보았다낮이든 밤이든 아인하르트와 있는 순간은 새벽 같았다긴 밤이 끝난 새벽찰나이나 누구에게도 방해받고 싶지 않은 그 소중한 시간에서 가장 아름다운 아인하르트의 보석 같은 눈동자가 라세인을 담았다작은 상자 속에서 꺼내진 약이 금세 사라질 상처를 덮었다자신이 다칠 것을 예상하고 준비되기라도 한 것 같은 물건이었다우연이겠지만.

 

밴드도 붙일게요.”

고마워아인.”

 

밴드만이 아니라 다른 것을 붙여도 괜찮다는 말 대신 선택한 감사의 인사를 들은 아인하르트의 미소를 본 라세인은 밴드가 붙여지는 그 순간을 가만히 기다렸다밴드가 붙고 아인하르트의 손이 떨어진 그 순간라세인의 두 팔이 아인하르트를 품에 안았다뱀파이어 헌터와 뱀파이어라는 사실만 아는 사람들이 보면 의아하게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뱀파이어 헌터가 뱀파이어―동족은 아니었지만―를 공격한 뒤에 뱀파이어를 품에 안은 상황이었으니까.

 

어떻게 왔는지 안 물어보네요.”

휴가를 받아서 아인이 어떻게 왔는지 물어볼 시간은 많아아주 많지그것과 별개로…

 

잘 왔어어서와아인.

고개를 숙인 라세인의 입술이 아인하르트의 이마에 닿았다부드러운 환영 인사가 된 키스는 욕심을 누르고 감정과 이성의 타협으로 만든 결과물이었다입술을 떼어낸 라세인은 여전히 가까운 거리에 있는 아인하르트를 보고 웃으며 속삭였다.

 

머리 장식그대에게 잘 어울려.”

 

*

 

창을 두드리는 빗소리가 요란했다스마트폰으로 확인한 일기예보로 많이 내린다는 사실은 미리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로 많이 내릴지는 예상하지 못한 라세인은집주인이 오는 날보다 안 오는 날이 많은 집에 마련된 찻잎 중에 하나를 꺼내며 아인하르트에게 물었다아인하르트가 선택한 차는 홍차였다홍차를 끓이고 다과를 준비하는 사이빗소리가 더 요란해졌다쉬이 그칠 비는 아닌 모양이었다.

 

테이블에 찻잔과 다과를 내려놓자 음식이 필요 없을지도 모르는 아름다운 연인이 미소 지으며 잔을 들었다잘 마실게요입에 맞았으면 좋겠다고 대답하며 라세인도 찻잔을 들었다제 입에는 나쁘지 않았지만 아인하르트의 입에도 맞았을까고민은 다음에 아인하르트의 집에 갈 때는 아인하르트가 끓인 차를 마셔보자는 약속으로 지워졌다.

 

비가 안 왔으면 저녁에도 아름다운 장소로 안내했을 텐데아쉽군.”

지금도 괜찮아요.”

 

라세인의 아지트에 온 기분이거든요다음엔 라세인의 지인들도 소개해줘요.

주인에게 항상 방치당하고 있는 이 집에 에고 웨폰처럼 자아가 있었다면 화를 냈을지도 모를 말이었다설명해주고 싶었지만 시간이 지나면 아인하르트도 알게 될 것이다그리고 그때는 자신도 아인하르트에 대해 아는 것이 늘어났겠지기대되는 미래의 모습에 찻잔을 내려놓고 웃은 라세인은 그렇게 하지라고 말한 뒤아직 장갑을 낀 아인하르트의 손을 잡았다잡힌 손을 빼내지 않은 아인하르트의 눈이 손을 잡고 가만히 있는 라세인을 보았다.

 

그대를 보니 부르고 싶은 노래가 떠올라서.”

어떤 노래가 떠올랐어요?”

사랑노래.”

 

내 연인이 되어달라고 상대에게 청하는 가사의 노래지.

소중한 사람이 생기면 부르고 싶다고 생각했었던 그 노래의 한 소절을 입에 올린 뒤의자에서 일어난 라세인은 나의 햇살이나의 달빛이 되어달라는 노래를 들은 아인하르트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내밀어진 손을 잡고 의자에서 일어난 아인하르트를 보던 라세인은 기억하는 스텝을 밟았다.

 

말없이 시작된 아인하르트와의 춤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춤을 췄던 순간보다 라세인을 긴장시켰으나 음악을 대신하는 다양한 소리와 손에 닿는 체온이 긴장을 풀었다빗소리가 작아지자 춤이 끝났다연회였다면 다음 파트너를 찾아야 이동했겠지만 이곳은 연회가 아니었다라세인은 갑자기 시작된 춤의 파트너가 되어준 아름다운 연인에게 닿아있는 손을 떼어내지 않은 채로 고개를 숙였다숨소리가 들릴 정도로 얼굴이 가까워졌다이제,

 

비가 그쳐도 곁에 있어달라는 건 아인을 곤란하게 만드는 부탁일까?”

 

빗소리보다 자신의 심장에서 나는 소리가 더 요란했다.



*
르네님이 주신 시츄(뱀파이어 헌터인 라세인과 뱀파이어인 아인의 만남)로 쓴 랏땅아인입니다.

에유로 쓸까 오리지널로 쓸까. 하다가 생각나는 상황이 있어서 오리지널로 썼어요!
즐겁게 읽어주시면 좋겠어요~!!

**

라세인이 부른 사랑노래는 Cocco의 기라성입니다. 아래는 기라성 들을 수 있는 유튜브 주소. 노래가 예뻐요. 가사도 예뻐요. 들어주세요...uu
https://www.youtube.com/watch?v=zm3WcvMD8DE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