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성

흑백세계의 보석

<span class="sv_member">에메트</span>
에메트 @acidcatsle
2026-02-07 19:04

하늘까지 닿으려는 것처럼 높이 쌓아올린 건물들로 이루어진 도시의 계절이 겨울에서 봄으로 바뀌면계절의 영향을 많이 받는 식물들은 다른 빛깔로 물들었다봄을 맞아서 다른 빛깔로 물든 식물들의 색에는 라세인이 태어난 세계와 다르게 도시가 가진 색을 빼앗을 정도의 힘은 가지지 못 했으나꽃을 구경하는 축제를 만들 정도의 힘은 있었다.

노랑분홍그리고… 지금은 흑백으로 보이는 식물들의 색을 기억 속의 풍경과 비교하던 라세인의 곁에서 손목시계를 보던 매트 브라운 컬러의 짧은 머리카락을 가진 청년유재하가 고개를 들어 라세인을 보았다자신의 선택이 아닌 타인의 선택으로 죽음을 맞을 권리를 잃어버린 청년이 스스로의 선택으로 쉽지 않은 길을 걸어가고 있는 별빛(Stea)이라 불리는 남자에게 물었다.

 

“10분 지났네변화는?”

그대로군.”

그대로라면 내가 처음에 한 말처럼 마법사를 찾아가.”

 

당신 지인이기도 한 그 여자가 제일 나을 것 같은데.

재하가 덧붙인 말을 들은 라세인은 재하가 그 여자라고 부른 소원을 들어주는 마법사를 떠올렸다연한 금발을 늘 묶고 있는 소원을 들어주는 마법사이브위험한 짓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라세인의 옛 동료는 정말로 유능한 마법사니 찾아가면 능력의 패널티를 받아서 세상의 모든 것이 흑백으로 보이게 된 라세인이 패널티가 풀릴 때까지 평소처럼 지낼 수 있는 방법을 알려줄 것이다하지만…

 

세상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 건 큰 패널티니까 숨기라는 명령을 받아서 말이야.”

 

상사인 은율이 휴가를 주면서 내린 명령은 라세인이 이 패널티를 해결하기 위해서 갈 수 있는 장소를 제한했다그 명령을 듣자마자 자신에게 걸린 장소의 제한을 무시하고 마법사를 찾아가는 것도 염두에 두었지만, ‘패널티가 새어나간 순간에 벌어질 최악의 사태가 라세인의 생각을 바꿨다언젠가는 현실이 될지도 모르지만 자신이 패널티를 받은 순간만큼은 아인하르트가 자신 때문에 위험한 일에 휘말리지 않기를 바랐다.

아인하르트가 얼마나 강한지를 알고 있음에도.

 

개인적인 이유도 있지만갑작스런 방문에도 맞아줘서 고마워다음에는 오늘처럼 들리는 일은 없을 거야.”

알았으니 얼른 가.”

 

예외적인 경우가 아니라면 언제나 맹약자만을 손님으로 받는 숙박업소의 주인―재하는 다음이 없었으면 한다는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맹약자로 살아간다면 벗어날 수 없는 위험 중 하나가 오염이었으니까.

친절함과는 거리가 먼 인사를 받으며 라세인은 갑작스럽게 들린 이름도 없는 숙박업소를 나왔다집을 향해 돌아가는 사람들 속에 자연스럽게 뒤섞인 그는 목적지인 공원에 도착한 뒤주머니 속의 휴대폰을 꺼냈다.

특수하게 제작된 휴대폰은 버튼을 누르지 않아도 주인이 원하는 것을 화면에 띄웠다아침라세인이 지금 있는 장소와는 완벽히 반대되는 시간이 화면에 떴다.

 

산책중일까.”

 

연락을 넣고 아인하르트의 곁으로 간다면 궁금증은 해결된다사람들이 원거리라고 부르는 물리적인 거리는 그 거리를 단번에 좁힐 비일상적인 방법을 가지고 있는 라세인에게 문제되지 않았으니까걱정하는 얼굴을 보고 싶지 않다는 마음과 그럼에도 곁에 있고 싶다는 마음이 충돌했다결국이긴 것은 그럼에도 곁에 있고 싶다는 마음이었다얼마인지 모를 시간을 흑백의 세상에서 살게 된 라세인이 하늘을 보며 중얼거렸다.

 

예전 직업이 믿기지 않을 정도의 욕심쟁이군나도.”

 

*

 

싸움이 끝난 직후세상이 흑백으로 변했을 때도 덤덤했던 창조의 맹약자는 흑백의 세상에서 유일하게 색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보고 숨을 삼켰다다양한 패널티를 경험했다는 이유로 덤덤하게 행동했지만 약간의 아쉬움은 있었다.

아인하르트도 흑백으로 보인다면흑백의 세상에서도 아인하르트는 누구보다 아름다울 테지만 그 아름다움을 볼 때면 모든 색을 제대로 보던 그 세계로 돌아가고 싶다는 갈망을 느낄 것이라 생각했던 라세인은자신의 상상을 뒤엎는 이례적인 상황에 당황했으나 자신을 발견하고 가까이 다가오는 아인하르트를 보고 당황을 추슬렀다금세 평소의 모습이 된 그의 앞에 선 아인하르트의 손이 라세인의 뺨을 매만졌다.

 

괜찮아요라세인?”

 

이곳으로 오겠다고 연락하면서 아인하르트에게 패널티에 대한 이야기를 해두긴 했다모든 것이 흑백으로 보인다고패널티 때문에 작아졌던 모습을 아인하르트에게 처음으로 보여준 그 날돌려서 말하는 일이 없을 거라고 덧붙였던 라세인은 괜찮아라고 대답한 뒤여전히 자신의 뺨에 닿아있는 아인하르트의 손을 잡았다.

 

흑백으로 보이지 않는 것도 있어서 조금 놀랐지만 말이야.”

예전처럼 보이는 것도 있다니 다행이에요그런데 라세인의 말대로라면 흑백으로 보이지 않는 것이 이 주변에 있다는 뜻이군요.”

 

생각에 잠긴 아인하르트의 손을 입술 앞으로 끌어와서 가볍게 키스한 라세인은 자신을 바라보는 보석처럼 아름다운 눈동자를 보며 웃은 뒤입술을 움직였다이 기묘한 패널티를 준 신이 원하는 게 뭔지는 라세인도 알 수 없었다하지만.

 

흑백으로 보이지 않는 것은 아인뿐이야.”

 

흑백으로 보이는 세상에서 유일하게 흑백으로 보이지 않는 사람이 사랑하는 아인하르트라니꼭 어둠이 가득한 세상에 내려온 한 줄기의 빛이나 온갖 시련을 견디고 손에 넣은 보석을 보는 기분이 들었다변덕적인 신은 이런 상황을 만들고 싶었던 걸까맹약자가 되면서 인간이라 부르기엔 어려운 존재가 되었지만 본질은 여전히 인간이라 신의 마음은 이해할 수 없는 전직 사제는자신의 말을 듣고 대답 대신 손을 꼭 잡으며 온기를 전해준 아인하르트와 함께 그녀가 산책하고 있던 공원을 걸었다흑백으로 보이는 세상은 아인하르트에게 닿거나 아인하르트가 가까이 가면 마법처럼 색을 찾았다.

 

불편하거나 내가 도울 일이 있으면 말해줘요.”

그래아인에겐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으니까.”

라세인이라면 하얀 거짓말은 할 거니까 조심하라는 이야기를 얼마 전에 들어서 조심할 생각이지만요.”

 

누가 한 조언인지는 이름을 듣지 않아도 알았다이 패널티를 임시라도 해결해줄 사람으로 가장 먼저 떠올린 사람이자 아인하르트의 친구인 이브였다하얀 거짓말을 할 거니까 조심하라는 이브의 조언을 아인하르트가 받아들인 이유가 자신을 향한 걱정임을 아는 라세인은 밤이 끝나고 찾아올 새벽과 아침을 기대하게 만든 소중한 사람을 푸른 눈에 담으며 말했다.

 

그대가 조심할 일이 없도록 해야겠군.”

무리는 하지 말아요.”

 

많은 일을 짊어진 라세인을 걱정하며 제때 쉬면서 일하는지를 물었던 아인하르트의 얼굴에 걱정이 스몄다라세인은 걸음을 멈춘 뒤자신을 따라 걸음을 멈춘 아인하르트의 뺨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행복한 일과 행복하지 않은 일은 언제나 공평하게 찾아온다그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눈앞의 연인에게는 행복한 일이 행복하지 않은 일보다 더욱 많이 찾아오길 이 세계에 있을 신들에게 기도하며 아인하르트의 뺨에서 입술을 떼어낸 라세인이 아인하르트에게 말했다.

 

아인도 무리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싸움의 그림자에서 벗어날 수 없는 서로를 걱정하는 대화를 마친 라세인과 아인하르트는 온기를 나누듯 서로를 끌어안았다봄의 향기가 서로를 끌어안은 두 사람을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

 

책을 읽던 아인하르트의 머리가 라세인의 어깨에 닿았다조금 기다리자 아인하르트는 라세인의 어깨에 기댄 채로 잠이 들었다아인하르트의 손에 들린 책을 조심스럽게 빼내서 테이블에 놓은 라세인은 고른 숨소리가 들린 지 10분이 흐르자 아인하르트의 몸을 안아들었다공주님처럼 들린 아인하르트를 방의 침대에 눕혀준 라세인은 아인하르트가 꿈을 꾸지 않고 푹 자길 바라며 방을 나가려고 했다그 순간아인하르트의 손이 라세인의 손을 잡았다.

 

아인?”

놀랐다면 미안해요.”

 

라세인의 어깨에 기대서 잘 때랑은 조금틀려서 깨버렸어요.

라세인은 자신의 손을 놓아주려는 아인하르트를 보다 말했다.

 

놓지 않아도 괜찮아아인의 곁에 있을게.”

 

침대에 앉아도 될까라고 묻는 라세인에게 앉아도 괜찮다고 대답한 아인하르트가 다시 라세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잘 자요라세인잘 자라는 인사를 마친 아인하르트의 눈이 감겼다고른 숨소리는 금방 들려왔다아인하르트가 평소에 얼마나 자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자신이 옆에 있으면 편하게 잔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그렇다면 아인하르트가 편히 잠들 수 있도록 계속 제 어깨를 빌려줄 라세인은 고른 숨소리를 듣다 입술을 열었다.

아인하르트의 잠을 방해하지 않을 잔잔한 선율의 자장가가 두 사람이 나란히 앉은 방 안에 울려 퍼졌다.

 

*

 

잠든 라세인을 깨운 것은 아인하르트의 목소리였다라세인사랑하는 연인의 아름다운 목소리에 눈을 뜬 라세인은 아인하르트와 함께 보내는 내내 흑백으로 보였던 세상이 제대로 보임을 깨달았다세상은 더 이상 흑백으로 보이지 않았다평소처럼 보이는 세상에서 라세인의 눈을 가장 먼저 채운 존재는 보석처럼 아름다운 눈을 가진 아인하르트였다.

 

오늘은 어때요?”

예전처럼 보여전부.”

 

대답을 마치고 일어난 라세인은 아인하르트에게 손을 내밀었다.

 

기쁜 일에는 춤이 어울린다는 이야기가 생각나서.”

 

아인하르트가 내밀어진 라세인의 손을 잡았다평소보다 눈부시게 느껴지는 아침은그렇게 찾아왔다.

 

 

*

3월 지나기 전에 꼭 쓰고 싶어서 힘내보았습니다. 즐겁게 읽어주시길 바라요!^3^
늘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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